‘향교·관아·활터’ 옛 읍성 원형 마지막 활터…김제 홍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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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관아·활터’ 옛 읍성 원형 마지막 활터…김제 홍심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08.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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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⑯ 선생안 옮겨간 자리에 팻말 걸었더니 정간 신앙

[드론촬영=안한진]

조선 시대 김빙(金憑)이라는 조정 관리가 있었다. 전주 출신으로 1580년(선조 1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으로 옮겼고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당시에는 추국관(推鞫官)으로 정여립(鄭汝立) 추형(追刑)에 참여했다. 평소 바람을 쏘이면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늦가을이었던 추형 당일 쌀쌀한 날씨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역적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죄목이 씌워져 곤장을 맞고 죽었다. 하담 김시양의 문견수필집(聞見隨筆集)인 『부계기문((涪溪記聞)』에는 그날의 일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기축년 옥사를 다스릴 적에 정철은 영수가 되고 백유함·이춘영 등은 오른쪽 날개가 되어 당론이 다른 자들은 때려 쳐서 거의 다 없애버렸다. 김빙이라는 자는 전주 사람이니 정철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틈이 생긴 지가 이미 오래였다. 김빙은 평소 풍현증(風眩證)이 있어 날씨가 춥고 바람이 불면 문득 눈물이 흘렀다. 정적을 육시할 때에 김빙도 백관의 반열 가운데 서 있었는데 때마침 날씨가 차서 어김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는 일찍이 백유함과 틈이 있었던 터라 백유함은 김빙이 슬피 운다고 얽어서 죽였다. 이때부터 조정과 민간이 꺼리고 두려워해 바로 보지 못했다.”

비단 김빙만이 아니었다. 김빙이 눈병으로 역적몰이를 당했다면 전라도도사였던 조대중(趙大中)은 애기(愛妓)와의 이별이 화근이 됐다. 전라도 지방을 순시하던 조대중은 부안에서부터 데려온 관기와 보성에서 헤어지게 돼 아쉬움에 눈물을 보였다. 이때 보성 사람 정교(鄭僑)가 나주에서 유발(柳潑) 등 여러 사람에게 그 일을 알렸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정여립의 죽음을 전해 듣고 방에 들어와 울었다’는 말로 와전됐다. 결국 조대중은 역적으로 몰려 팔·다리가 말에 묶여 사지가 찢겨 나가는 육시형(戮屍刑)을 당했고 그의 처첩과 자녀, 동생과 조카 등도 모두 죽임을 당해야 했다.

임진왜란을 3년 앞두고 발생한 기축옥사는 정여립 역모사건이 계기가 됐다. 500여만명에 불과했던 조선 인구 가운데 희생자만 1000여명에 이른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고승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도 연루돼 모진 국문을 받았지만 겨우 목숨만은 건졌다. 명종(1534~1567년)대의 척신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이 정치적 사건을 정리한 『괘일록(掛一錄)』에는 이같은 피해자들의 면면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하늘에서 본 김제 홍심정 전경. [사진=안한진]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는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과 ‘어찌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누구든 섬기면 임금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앞세워 대동사상(大同思想)을 펼친 정여립은 자호(自號)로 삼았던 진안군 상전면 수동리의 본거지 죽도(竹島)에 토벌군이 들이닥치자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기축옥사로 정여립은 동래 정씨 족보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고 무덤도 없다. 그가 살았던 집은 불태워졌고 텃자리까지 파내 깊은 웅덩이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철도가 놓이면서 웅덩이까지 메워져 생전 정여립이 살았던 집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의 대동사상은 훗날 ‘백성은 물이나 불·호랑이보다 더 두려운 존재’라는 허균의 호민론(豪民論)과 하·은·주나라 시대 탕왕과 무왕의 왕조 교체 정당성을 주장한 정약용의 탕무혁명론(湯武革命論)으로 이어졌고 다시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기축옥사를 불러온 정여립 역모사건은 그 실체가 불분명해 아직까지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정여립이 실제 역심(逆心)을 품고 있었느냐가 논쟁의 쟁점이다. 다만 송익필이 배후조종하고 송강 정철이 전면에서 칼을 휘두른, 서인(西人)의 동인(東人)에 대한 대학살극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용암마을에 조성된 용마 무덤. 왼쪽 위쪽 멀리 상두산이 보인다. [사진=한정곤 기자]

◇ 하루 천 리를 달렸다는 정여립의 용마 무덤
호남고속도에서 금산사IC로 빠져나와 금산사 방향으로 3km쯤 갔을까. 용암교를 건너 들어선 조그만 마을 앞으로 새파란 잔디가 깔린 축구장을 잇대어 놓은 듯한 논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슬처럼 낟알을 머금은 벼가 질서정연한 군무인 듯 바람에 출렁인다. 논둑길을 따라 그늘을 드리운 두 그루의 노거수 아래 봉긋 솟은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비석이나 상석 등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규모는 그리 작지 않다. 정여립이 타고 다녔다는 용마의 무덤이다.

정여립은 용암마을로 불리는 이 마을에서 처음 대동계를 조직했다. 그는 북동쪽으로 1.5km 떨어진 제비산에 살고 있었으며 용암마을 뒷산에는 조상의 무덤과 사당이 있었다. 남쪽 상두산에서는 부하들과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무술을 연마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제비산에서 천일기도를 마친 후 용암마을 남쪽으로 150m 떨어진 용바위 아래에서 용마(龍馬)를 얻었다고 해 마을 이름도 용암(龍岩)이라 붙여졌다.

그의 용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정여립은 자주 용마를 타고 활을 쏘아 용마와 화살 중 누가 빠른지 시합을 했다. 그날도 정여립은 화살을 쏜 후 용마를 타고 달리는데 용마가 화살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 하자 홧김에 말에서 내려 목을 베어버렸다. 그 순간 화살이 용마의 궁둥이에 꽂혔다. 경솔함과 어리석음을 탓한 정여립은 슬퍼하며 용마를 선산 앞에 묻었다.

고흥분청문화박물관 앞에 전시된 전상용 작가의 ‘송팔응 장군과 백마’. [한정곤 기자]
고흥분청문화박물관 앞에 전시된 전상용 작가의 ‘송팔응 장군과 백마’. [한정곤 기자]

말이 화살보다 빠르다는, 조금은 황당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비슷한 전설은 경북 영천과 전남 고흥에서도 전해온다. 국토교통부 국토정보지리원에 따르면 영천시 고경면 도암리에는 ‘말무덤’이라는 지명이 있다. 고려 말 황보 장군이 자기 말을 데리고 화살과 누가 빠른지 내기를 하다가 말이 화살보다 늦었다 하여 목을 베고 나니 그제야 화살이 떨어져 후회하고 그 말을 이곳에 묻었다 해 붙은 지명이다.

고흥군 점암면 팔영산 제1봉 유영봉(儒影峰)에도 송팔응(宋八應) 장군과 백마의 전설이 전해온다. 어려서부터 팔영산에서 무예를 연마한 송팔응은 자신의 애마인 백마의 출중한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화살 속도와 백마의 속도를 시합해 보기로 했다. 그는 팔영산 유영봉을 겨냥해 화살 한 발을 쏜 뒤 곧바로 백마를 타고 뒤쫓았다. 그러나 유영봉에 도착했을 때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이 늦게 도착했다고 판단하며 실망한 나머지 백마의 목을 단칼에 베고 말았다. 그때 뒤늦게 화살이 날아와 봉우리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송팔응은 자신의 경솔함을 크게 뉘우치며 통탄했지만 이미 백마는 죽은 후였다. 송팔응은 이후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며 무예를 더 연마했고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송팔응이 쏜 화살이 팔영산 유영봉을 뚫고 지나간 자리는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여립의 용마 이야기는 이들 설화와 달리 허투루 흘려버리지 못한다. 용암마을 주민들에게는 신앙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여립의 조상 사당이 있었던 자리에 지어졌다는 대한불교 태고종 쌍용사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 용마의 원혼을 달래주는 용마제(龍馬祭)를 지내고 있다. 쌍용사 보살 한 분은 “제사를 지내지 않은 해가 있었는데 흉년이 들었다”면서 “이후에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말했다.

원래 논 가운데에 있었던 용마 무덤은 지난 2016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됐다. 쌍용사 소유였던 논을 동래 정씨 문중에서 사들였고, 그 중 용마의 무덤이 있던 7.7㎡의 땅을 김제시에 기부채납하면서 조건으로 이장을 원했다고 김제시 관계자는 전한다. 일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장 당시 무덤에서 말뼈가 나왔다는 말도 떠돈다. 그러나 김제시 관계자는 “발굴조사를 다 했지만 아무 것도 없어 흙만 떠서 옮겼다”며 “설화에 기초한 무덤 아니냐”고 일축했다.

설화는 설화 그 자체로 아름답게 남아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설화를 굳이 경제적 이익을 앞세워 파헤치고 옮기면서 과학적으로 따져야 했는지 할 말을 잃는다. 실제 용마가 묻혀 있었다 하더라도 4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세월 동안 그 뼈가 온전할 리도 없다.

홍심정 왼쪽의 성산을 넘으면 사적 제482호 김제 관아와 향교, 용암서원과 벽성서원 등 전통적 유교 자산을 볼 수 있다. [사진=안한진]

◇ 향교, 관아 그리고 활터…옛 읍성 지도의 원형
김제의 옛 이름은 금구였다. 1895년(고종 32년)까지만 해도 전주부 금구군이었고 1896년에야 전라북도 금구군이 됐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김제군에 병합돼 금구면으로 바뀌었으며 1995년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합돼 김제시로 불리고 있다.

정여립이 살았다는 금산사 입구의 원평은 조선 후기 번영한 시장으로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머물며 각지의 집강소(執綱所)를 지휘하던 동학농민운동의 거점이었다.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한 역사학자 고(故) 이이화 선생은 “기축옥사의 여파로 금구가 전주에 복속되고 전라도를 반역의 고을로 몰아 호남 인사의 등용을 억제하는 등 역사적 폐단이 끝내 이곳을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로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전라도 사람들의 반골(反骨) 기질과 ‘역모의 땅’이라는 주홍글씨의 진원지가 알고 보면 김제였음이다.

지평선이 보일 만큼 끝이 보이질 않는 만경평야를 가득 채우고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낟알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논을 가로질러 달리는데 안한진 접장이 “내가 농민이었어도 죽창을 들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넓은 땅에서 거둬들인 쌀로 내 식구를 먹이지 못하고 모두 빼앗긴다면 반란의 대열에 서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금산면의 산들은 서쪽의 김제시로 향할수록 하나씩 둘씩 깎여 더욱 광활한 대지로 바뀌어 간다. 급기야 산들이 모두 사라지고 평야 군데군데 소나무가 빽빽한 구릉만 바다 위의 섬처럼 떠 있다. 그나마 가장 높은 산 아닌 산이랄까. 김제 도심으로 들어서자 해발 48m에 달하는(?) 성산(城山)이 이방인을 반긴다. 돌고 돌아 홍심정(紅心亭)을 품고 있는 산을 만난다.

사진6. 1872년 김제 읍성 지도. 확대한 오른쪽 지도에서 붉은색 원 왼쪽부터 향교, 향사청, 관아, 활터가 확인된다.
사진6. 1872년 김제 읍성 지도. 확대한 오른쪽 지도에서 붉은색 원 왼쪽부터 향교, 향사청, 관아, 활터가 확인된다.

피지산(避支山)이라 불렸던 성산은 김제의 주성(主城)으로 누가 언제 어떻게 쌓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교동 성산성지(城山城址)에는 남·서·북쪽에 토성으로 쌓은 흔적이 남아 있다. 서해 연안에 가장 근접한 성으로 해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충청·전라 내륙으로 통하는 요충지이기도 했다. 백제 패망 후에는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이 귀국해 백제부흥운동을 벌였고 이때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적 제482호인 김제 관아와 향교, 용암서원과 벽성서원 등 전통적 유교 자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김제의 중심지다.

홍심정은 성산 서쪽 절개지에 자리하고 있다. 1789년(정조 13년) 성산 북쪽 언덕에 조지택 초대 사두가 천홍정(穿紅亭)이란 정자를 세우고 활터를 조성한 이후 1820년(순조 20년) 장소가 협소해 서변면 옥거리(현 옥산동)로 이전했고 1826년(순조 26년)에는 서변면 사정거리(현 요촌동)로 다시 옮겼다.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에는 중건과 함께 현판도 홍심정으로 바꾸어 달았고 1978년 활터와 정자를 신축하며 원래 활터가 있었던 성산으로 되돌아왔다.

홍심정 사원으로 서울대 스포츠과학연구소 연구원인 박근 군산대 교수는 “과거 읍성 지도를 보면 향교, 관아, 활터가 나란히 배치돼 있다”면서 “김제는 성산을 중심으로 학문의 중심지였던 향교와 무술 연마의 중심지였던 활터, 행정의 중심지였던 관아가 한데 어우러진,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읍성의 원형이 온전히 보존된 곳”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홍심정은 한때 김제시에 의해 외곽으로 쫓겨날 뻔하기도 했던 위기의 시기가 10여년이나 이어진 적도 있었다. 2006년 취임한 이건식 김제시장이 홍심정 오른쪽에 문화예술회관을 신축하며 성산공원 활성화를 위해 홍심정 이전을 추진한 것이다. 처음엔 많은 사원들이 3억원의 이전보상비를 제시한 김제시 정책에 맞장구를 치면서 검산체육공원에는 현대식 활터가 미리 착공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2016년 홍심정은 사원총회를 통해 이전을 부결시켰고 한 달 뒤 김제시가 매입 의사를 철회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2017년 검산체육공원에 준공된 활터는 현재 금만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전을 주장했던 홍심정 사원 일부가 개정 초기 참여하기도 했지만 또 일부는 다시 홍심정으로 되돌아왔다.

김제 홍심정 사정 전경. [사진=안한진]

◇ 선생안·사안으로 230여 년 역사 온전
김제시청 뒤편 성산길 옆에 자리한 홍심정은 무겁이 사대보다 2.7m가 높아 앙사(仰射)가 특징이다. 사대에서 보면 왼쪽으로 군데군데 성산 기슭을 깎아내린 암벽이 속살처럼 드러난다. 일제강점기 수탈을 목적으로 김제와 군산을 잇는 도로가 건설됐는데 이때 채석을 했던 생채기들이다. 홍심정이 들어서기 전까지 채석장이 방치되면서 이곳에는 2개의 거대한 웅덩이가 생겼다고 한다. 당시를 기억하는 홍심정 노접장은 “연애에 실패한 처녀들이 성산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웅덩이로 유명했다”면서 “귀신 나온다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없던 외진 곳이었다”고 전한다. 웅덩이는 활터가 조성되면서 메워졌고 현재 그 자리엔 국기봉이 도열해 있다.

사정(射亭)은 목조 한옥 양식과 콘크리트조 양식이 하나로 합쳐진 복합건축물이다. 현대식 콘크리트 건축물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한옥 건축물을 이고 있다. 1층 콘크리트 건물 내부에는 230여 년 동안 사두를 역임한 102명의 성명·사진과 각종 서예 액자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사두실과 주방이 옆으로 배치됐다. 2층 한옥 건물에는 홍심정의 역사를 증언하는 각종 편액들을 보관하고 있다.

현판은 두 개가 전해오는데 1층 사대 뒷편의 현판은 청암(淸巖) 이상록(李相錄·1929~1998년)이 썼다. 김제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서예와 유학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과 왕래하면서 잘못된 점을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질정(叱正)을 받으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특히 안진경체를 좋아해 전라북도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했고 초대작가와 심사위원도 했다. 평생 김제에 살며 김제문화원장(1981~1987년)과 김제향교 전교를 지내는 등 김제 문화의 계승과 창달에 열정을 가졌다. 현판에는 ‘西紀 一九八三年 癸亥 全羅北道弓道協會 郭在松 會長 雅囑 淸庵 李相錄(서기 1983년 계해 전라북도궁도협회 곽재송 회장 아촉 청암 이상록)’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어 당시 전북궁도협회 제8대 회장이었던 곽재송 회장의 부탁을 받아 적은 것으로 확인된다.

홍심정 현판. 위쪽은 1층 사대 뒤편·아래쪽은 2층 한옥 내부에 걸려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2층 한옥 건물 내부에는 이보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현판이 하나 더 있다.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낙관과 함께 ‘金石山 鴻墨(김석산 홍묵)’이라 쓰여있다. 그는 석산(石山) 김필형(金弼瀅)으로 확인되지만 행장은 물론 언제 어떤 인연으로 홍심정 현판을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판 외에는 서변면 사정거리에 있을 당시인 1970년 작성된 <홍심정장원신축기(紅心亭牆垣新築記)>와 1978년 사정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올 때 작성된 <홍심정신축기(紅心亭新築記)> 등의 편액이 있지만 정작 초기 천홍정 현판과 정기(亭記)가 없다. 1892년(고종 29년) 51대 사두 진사 조방순 공원(현 재무 직책) 때 103년의 역사를 간추려 기록한 이후 1956년까지 64년간의 기록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따라서 시기가 확인되지 않은 김필형의 현판도 19세기보다는 20세기에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강신관 사두는 “천홍정 현판과 정기 등이 무슨 연유로 한꺼번에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나마 선생안(先生案)과 사안(射案)이 전해지고 있어 230년이 넘는 홍심정 역사를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고 말한다. 실제 200년이 넘는 대부분의 활터들은 초대 사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몇 대 사두인지조차 알지 못해 셈을 하지 않은 활터도 있다. 그러나 홍심정은 조지택 초대 사두부터 현 102대 강신관 사두까지 선생안에 기록돼 있다.

홍심정 선생안과 사안. 선생안에 기록된 내용을 박근 교수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선생안은 역대 사두의 이름을, 사안은 역대 사원들의 이름을 기록한 책이다. 이름 아래엔 태어난 해와 자호(字號)가 두 줄로 나란히 적혔고 관직이 있는 경우 직책도 기록했다. 가족이 사원이라면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증손자라는 내용과 함께 맨 아래에는 본관을 적었다. 선생안과 사안은 2층 한옥 감실(龕室)에 보관했지만 도난당한 적이 있어 되찾은 뒤부터는 1층 사무실 금고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홍심정은 최근 사무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기록물을 하나 더 찾아냈다. 1903년 전주 3사정(다가정·읍양정·군자정)의 후원으로 개최한 편사대회(便射大會) 시지(試紙)다. 홍심정 사원으로 시지를 처음 발견한 김산 전북대 교수는 “사원들이 사무실을 정리한 후 잡다한 쓰레기를 소각하려는데 오래된 듯한 한지가 눈에 들어왔다”며 “소각을 멈추고 확인한 결과 시지였다”고 말한다.

1903년 전주 3사정 후원으로 개최된 편사대회 시지(試紙). [사진=한정곤 기자]

김산 교수가 꺼내온 시지는 천홍정의 붉은 색지와 관덕정의 노란 색지 두 장이 합쳐져 있다. 출전선수들의 이름과 밑에는 3순(巡)을 쏘아 관중한 화살의 수가 꺾쇠(∧) 모양으로 표기돼 있으며 맨 아래에는 전체 관중 숫자가 적혀있다. 이와 함께 붉은 색지 뒷면에는 ‘비김제천홍정부족삼시(比金堤穿紅亭不足三矢)’, 즉 김제 천홍정과 비교해 3시가 부족하다는 내용이, 노란 색지 가운데에는 ‘비태인관덕정가삼시(比泰仁觀德亭伽三矢)’, 즉 태인 관덕정과 비교하면 김제 천홍정이 3시가 많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다시 말하면 3순 편사에서 김제 천홍정이 태인 관덕정보다 3시를 더 관중해 승자가 됐다는 것이다.

원래 시지는 과거시험에 사용하는 종이를 뜻하지만 활터에서는 활쏘기 성적을 기록한 종이를 일컫는다. 일종의 채점표로 획기지(劃記紙)라고도 불린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지는 1678년 향적계획지와 정조의 고풍이 있으며 『조선의 궁술』에 사례로 제시된 1872년 풍속정 장안편사 시지 등이다. 특히 시지는 활쏘기대회 주최 측에서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우승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탓에 개인소장이 많아 수집하기가 어렵고 연구는 더더욱 드물다. 홍심정에서 발견된 시지도 당시 태인 관덕정과의 결승전에서 이겨 우승했기 때문에 사정에 보관돼 있었다. 김산 교수는 “근대 시지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면서 “장안편사와 인천편사 등 경인지방에서는 흔했던 것으로 알려진 편사가 지방에서도 오래전부터 행해졌음을 확인시켜 준다”고 말한다..

습사하는 홍심정 사원들. 오른쪽부터 강신관 사두, 양창진 고문, 강복식 접장, 정해영 접장, 박근 교수, 김산 교수. [사진=한정곤 기자]

◇ 정체불명의 팻말 ‘정간’
박근 교수의 안내로 홍심정 1층을 둘러보던 김가화 여무사가 태극기 옆에 걸린 정간(正間) 팻말을 보고 의아해한다. 2019년 황학정 국궁교실을 거쳐 입사한 이후 황학정 이외에 다른 활터를 방문한 적이 없는 김가화 여무사에게는 당연히 낯설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현재 황학정을 비롯한 일부 활터를 제외하고 전국 대부분의 활터에서는 사정 가운데 정간 팻말을 걸어놓고 출입 시 배례(拜禮)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유래를 알고 있는 이는 또 단 한 명도 없다. 1970년대부터 불쑥 활터에 기생하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팻말에 대해 국궁계 내부에서는 오래전부터 존폐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옹호론자들은 활터 예절을 들먹이며 듣도 보도 못한 정간사상론까지 앞세워 유지를 고집하고 있다.

홍심정의 정간은 이러한 논란에 간단명료한 해답을 제시한다. 홍심정의 정간 팻말이 활터 최초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최소한 도입과정만큼은 명확하게 확인된다. 또한 누가 언제 제작해 걸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여느 활터와는 달리 글쓴이가 확인돼 제작시기도 추정된다.

현재 정간이 걸려있는 1층 콘크리트 건물 가운데는 한옥의 대청마루처럼 조성돼 있다. 대부분의 행사는 마루 바깥쪽에서 이루어지고 사원들도 쉽사리 신발을 벗고 올라가지 않는다. 한국무예학회가 발행한 『무예연구』(2017년 여름호)에 게재된 박근 교수의 논문 ‘정간의 원형으로서의 김제 홍심정 선생안 연구’에서는 이를 전형적인 사당의 변형된 공간으로 해석한다. 정면 3칸 사당의 안쪽에 위패를 모셔놓고 문을 닫아 평소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제례 시에만 문을 개방하게 되어 있는 일반적 구조를 홍심정에서도 문을 대신해 단을 높여 마루를 조성함으로써 평상시 쉽게 올라가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선생안과 사안을 보관했던 함(감실). 2층 한옥 정간에 설치돼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또한 마루 외곽의 벽 위에 걸린 역대 사두의 성명·사진을 사당의 위패 대용으로 해석하면서도 예(禮)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2층 한옥 건축물에 예전 활터에서 옮겨온 감실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실제 2층에는 홍심정 선생안을 보관하는 함(감실)이 3칸의 가운데, 즉 정간에 설치돼 있다. 다만 구조의 편리상 약간 벽 위쪽 오른쪽 가장자리에 치우쳤을 뿐이다. 박근 교수는 1층 마루와 선생안을 보관한 2층 감실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2층 난간도 사대로 사용했지만 오르내림의 불편함으로 점차 1층 사대만 사용하게 되면서 계단마저 철거해 2층은 사용하지 않은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렇듯 1층이 주된 공간이 되면서 선생안은 2층에 그대로 그대로 남겨둔 채 1층에는 역대 사두의 성명과 사진을 위패 대용으로 걸어놓게 됐고 정간이라는 팻말도 걸게 됐다. 또 누군가의 반발로 그 옆에 태극기도 함께 걸어두게 됐다.”

박 교수는 “1978년 신축 이전 기념 전국대회를 비롯해 지금까지 꾸준히 대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대회 참석자들이 보기에는 정간이라는 팻말에 대한 배례로 오해했을 것”이라며 “선학(先學)에 대한 공경이라는 예의 본질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심리까지 더해져 이후 신설 활터에서조차 모실 선조가 없어 세워둘 선생안이 없는데도 정간 팻말을 걸고 거부감 없이 수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선생안이 있던 자리에 정간이라는 팻말을 걸었더니 정간사상이라는 그럴듯한 종교가 생겨난 것과 다르지 않다.

홍심정 정간. [사진=한정곤 기자]

홍심정 정간에는 ‘正間’이라는 한자와 함께 ‘剛菴(강암)’이라는 글쓴이의 호가 적혀있다. 사대 뒷편 처마 밑에 걸려있는 1983년 홍심정 현판을 쓴 청암 이상록과 교류했던 송성용(宋成鏞)의 호다. 1913년 김제에서 태어나 1999년 타계했다. 홍심정 정간 제작시기가 20세기 이전으로는 거슬러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는 한국서예의 독자적 경지를 이룬 호남을 대표하는 서예가이면서 유학자다. 일찍이 한학에 입문해 문리(文理)를 터득했고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 5체는 물론 대나무·난초·매화·국화·소나무·파초·괴석 등 다양한 소재의 문인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1956년 한국전쟁 후 외부의 권고에 못 이겨 대한민국서예대전에 출품해 행서와 화죽 2점을 출품해 입선하면서 유명해졌다. 서예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이 강한 유학자로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보발과 한복을 지키며 한평생 선비로서의 강직함을 지키면서 살았다.

1995년 고택 옆에 강암서예관을 설립하고 국내외 유명작가의 작품 등 1162점을 전주시에 기부해 현재 국내 최초 서예전문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강암서예학술재단을 설립해 서예의 학술적 연구와 장학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사실 정간의 개념은 한국식 목조건축에서 길이와 면적을 나타내는 기본 단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선왕조실록사전’에는 간(間)을 길이와 면적을 나타내는 건축의 기본 단위로 설명한다. 목조가구식 한국 건축에서는 기둥 간격을 무한정 크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간이라고 한다. 구조를 기준으로 정면은 대개 도리로 연결되기 때문에 도리간(道里間), 측면은 보로 연결되기 때문에 보간[樑間]이라고 부른다. 도리 방향과 보 방향이 여러 칸일 경우 대개는 정면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중앙 칸을 조금 넓게 하는데 이를 정칸[正間]이라고 한다. 다만 궁궐 건축에서는 이를 어칸[御間]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간(間)이라는 개념은 한국식 목조건축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하는 단위일 뿐이고 정면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금 넓은 가운데를 정간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목조건물이 아닌 콘크리트 건물로 건립된 전국 활터에는 적용조차 부적절한 개념일 뿐더러 선생안조차 없는 활터에서 정간 팻말을 걸어놓고 신성시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해하기 힘든 촌극이 아닐 수 없다.

사대에서 본 홍심정 무겁. [사진=한정곤 기자]

흔히 옹호론자들은 1912년 제정된 전주 천양정 규례를 근거로 정간 팻말의 정통성을 강조한다. “사원이 사정에 진(進)할 시는 반드시 먼저 정간에 배례한 후 사반에 입함”이라는 문구와 1958년 천양정 헌장 제25조 “정간은 선생안의 봉안 또는 사장(射長: 사두)의 정좌를 상징한 존엄처이므로 정간 또는 정간의 정면은 타인의 침범을 불허한다”는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정간은 팻말이 아닌 본래의 개념인 공간을 의미한다. 또 그 공간은 선생안이 봉안돼 있기 때문에 존엄처가 된다. 위패가 없는 사당이 사당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난 7월 250여년의 역사를 가진 강경 덕유정이 정간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선생안 위폐 봉안함을 설치한 것 역시 같은 이유다. 덕유정 선생안에는 121위(사백 40위·접장 81위)의 위패가 안치돼 있으며 매년 음력 7월15일 선생안제례(先生案祭禮)를 올리고 있다.

김가화 여무사가 한마디 보탠다. “선생안 만드는 게 어려운가요? 선생안이 없는 활터라면 지금부터라도 선생안을 만들어 정간 자리에 모시면 팻말이 필요 없겠는데요?”

아무리 전통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본질이 왜곡된 빈껍데기뿐인 관습까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김제 홍심정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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