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천변 연꽃 피는 활터…괴산 사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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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천변 연꽃 피는 활터…괴산 사호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07.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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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⑭ 옛 활터 잇지 못한 아쉬운 단절의 역사
사호정 전경. [사진=안한진]

인간의 모든 창작물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넘어서지 못한다. 세기를 뛰어넘는 찬사의 예술품도 한낱 자연의 일부분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 그저 자연을 닮기 위해 모방의 최대치에 다가갈 뿐이다.

누군가 인간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인식과 가치체계는 이(理)나 지(智)가 아닌 정(情)과 감(感)을 바탕으로 형성되고 진화한다고 했던가. 이성보다는 본능이 앞선 탓에 판단 기준은 일정한 틀이 없고 보는 이마다 관점이 다르고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저마다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는 미적(美的) 욕구의 대상이 획일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몇 년 전 어느 한 사람의 제언으로 국궁신문 밴드에는 사계절을 담은 전국의 활터 사진이 경쟁적으로 올라왔다. 꽃이 피고 낙엽이 깔리고 눈이 덮인 활터의 풍경은 그대로 한 장의 그림엽서였다. 그러나 사진만으로는 어느 활터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대에서 과녁을 향한 앵글은 원거리 배경만 일부 다를 뿐 한결같이 널찍하게 뻗은 평지의 잔디밭 일색이었다.

산 아래로 바위가 흘러내린 서울 황학정, 과수원을 끼고 있는 나주 인덕정, 울퉁불퉁 언덕이 계곡을 따라 과녁에 이르는 무안 숭덕정 등을 비롯해 남원 관덕정, 화순 서양정, 통영 열무정, 하동 금오정 등등 자연을 그대로 살려놓은 활터와는 감동이 달랐다.

이미 오랜 역사의 활터들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개발이다 뭐다 해서 체육공원으로 내쫓기고 있는 현실에서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그래도 모방의 최대치에 다가가는 흉내라도 냈으면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드론촬영=안한진]

◇ 연풍면·청안면 활터의 흔적들
늑장을 부리는 장마 대신 게릴라성 소나기가 오락가락 주말을 적신다. 지방이라고는 하지만 2시간 남짓 거리의 충청북도라는 점이 그나마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괴산읍 서북쪽에 자리 잡은 사호정(射虎亭)은 다녀온 이들마다 권했던 활터다. 욕심내지 말고 편하게 힐링하는 마음으로 한 번쯤 다녀오기에 좋은 활터라는 설명이었다. 여기에 현대식 국궁장으로 조성한 활터 가운데 자연친화적 조경미(造景美)가 가장 빼어나다는 말은 사호정을 가보지 않은 이들까지도 덧붙이는 특징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지만 더도 말고 덜고 말고 듣던 그대로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구릉 같은 야산이 벽을 두르고 큰 키를 자랑하는 길쭉한 메타세콰이어가 병풍처럼 감싸는 아늑한 분위기다. 위협적인 요소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하늘에서 본 사호정 전경. [사진=안한진]

아무리 충청도가 활쏘기의 변방이었다고는 하지만 사호정의 역사는 그리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단절의 역사도 너무 극명하다. 세 개의 활터가 구전과 기록으로 전해오지만 오늘날 사호정과는 연관성을 갖지 못한 별개의 활터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말기에 있었다는 군자정(君子亭)은 구전 외에 아무런 기록물을 전혀 남기지 않아 존재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괴산군 연풍면·청안면으로 편입된 조선 말 연풍현과 청안현에는 활터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괴산에서도 활쏘기가 성행했을 것이란 추정만 가능하다.

괴산군 서남쪽에 위치한 청안면에는 읍내리 장터 앞뜰에 활터가 있었다며 지금도 사장터로 불린다. 또한 동남쪽에 위치한 연풍면에는 숙종 30년(1704년) 연풍현감 이만형이 세운 관덕정(觀德亭)이 있었다. 현재 사정(射亭)은 사라지고 두 개의 관덕정기(觀德亭記)가 각각 『직재집(直齋集)』과 『연풍읍지(延豊邑誌)』에 전해온다.

옛날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가 촉나라를 다스릴 때 관청과 군영 수리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어찌 노고와 비용을 알지 못하겠는가. 지금의 연풍현감 이자하(子夏: 이만형의 자(字))는 부임한 지 4년 동안 관청의 허물어지고 무너진 것을 수리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열무지소(閱武之所: 군사를 사열하는 곳)에는 옛날 건물이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 정자를 세웠으니 그가 마음 쓴 일은 옛사람이 한 일과 같은 것이다. 정자를 세운 뒤 관덕정이라 이름하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내 비록 정자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이름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 일찍이 들으니 예경(禮經)의 사의(射義)에 이르길 “활쏘기는 성덕(盛德)을 보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제 이 정자에 올라 활쏘기를 익히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안으로는 뜻을 바르게 하고 밖으로는 몸을 곧게 하여 활과 화살을 바르게 잡은 연후에 쏘아야 정확하게 맞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觀)’은 그 덕행에 따라서 가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하는 것은 명분을 돌아보고 의(義)를 생각하며 날마다 그 중앙을 쏘는 것이다. 이는 주부자(朱夫子: 송나라의 학자 주희(朱熹))의 사포지설(射圃之說)과 같다. 다만 기술과 재주만을 익히는 것이 아니요, 위로 어버이와 어른을 섬기는 도리로서 싸움에 나가는 것이리라. 지금의 연풍현감이 이 정자를 세운 것은 이러한 깊은 뜻이 있었음을 가히 알 수 있다. 또 현감은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려 먼저 굶주린 백성을 진심으로 구제하고 가난을 없앤 다음 허물어진 관아를 수리하고 새로 지었다. 이것은 못된 관리들이 자기의 사사로운 일에 열중하는 것에는 눈을 두지 않고 자기의 본분으로 경영한 것이다. 못된 관리들은 관아가 무너지고 헐어지는 것 보기를 마치 밤에 주막에 들렸다가 아침에 떠나가는 나그네가 보는 것처럼 하였으니 어찌 지금의 연풍현감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연풍현감이 한 일을 기쁘게 생각한다. 주자(朱子)의 활쏘는 가르침을 보고 단지 글쓰는 기한이 지난 탄식만을 면할 수 있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간략하게 그를 위하여 쓰노라.

글쓴이는 이기홍(1641~1708년)으로 효릉참봉(孝陵參奉)을 거쳐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냈고 연풍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저서로 『직재집(直齋集)』, 『자성편(自省編)』, 『위학적방(爲學績方)』이 있다.

[드론촬영=안한진]

다른 관덕정기는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좌의정·영의정을 지낸 후 말년에는 연풍에 은거했던 정호(鄭澔: 1648~1736년)의 글이다.

정자가 무너지고 현판은 떨어지니 병술년(1706년) 여름에 고쳐 단장하고 이름을 응향정(凝香亭)이라 고쳐 편액했다. 연풍의 이태수(李太守: 이만형)는 글 읽기와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낮은 벼슬에 머물렀지만 세상의 업무에 유명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처음 벼슬하면서부터 원으로 나오기까지 여러 번 상소했지만 말한 일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비록 때에 어긋남이 있어도 뜻은 아름다웠다. 이 고을에 부임한 지 4년 한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여 오히려 편안하게 다스리며 학문을 일으키는 데 뜻을 두어 여러모로 회유하였으며 시골에 글방 두기를 장려하여 공부를 시키며 초하루마다 강론하니 그 빛나고 빛나는 모습이 볼 만 하였다. 또 틈 있는 대로 무술을 닦게 하되 연풍에 군사를 사열하는 곳이 없는지라 드디어 집 한 채를 관아의 서쪽에 세우고 이름을 관덕정이라 하였다. 이는 대개 ‘활 쏘며 덕을 본다’는 뜻을 취한 것이요, 오로지 군사를 사열하는 데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활 쏘는 사람과 활 쏘지 않는 사람이 함께 과거를 보지 않고 멀리한다면 실로 볼 수 있겠는가.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곧 병사라 하여 그 근본을 힘쓰고, 실력을 두텁게 한다는 뜻은 속된 사람으로서는 망령되게 평할 바는 아닌 것이다. 나에게 시를 지어 읊도록 청하므로 간략하게 짧은 율시(律詩)를 써서 보내노라. 숭정후(崇禎後) 을유(1705년) 4월.

정호가 관덕정기와 함께 써서 보낸 짧은 율시는 다음과 같다.

선비가 군사를 모르면 선비가 아니니  士不知兵不謂儒
현감은 좋은 의견으로 다스리시게      使君爲政儘嘉謨
정자에 걸린 관덕정 글씨 뚜렷하니     揭堂觀德規模盛
법 따르고 재주 견주어 명실 갖췄네    設法較才名實俱

나라 지키고 정미 잘하는 일이 급해도 衛國善毇雖急務
백성을 교화하는 일을 어찌 피하리오  敎民敦本豈眞迂
문옹이 촉군의 다스림 이룩한 날에도  文翁蜀郡治成日
유화는 이루었어도 국방은 없었다네   儒化能兼武備無

여기서 문옹(文翁)은 중국 한나라 경제(景帝) 말기 교화를 숭상해 학교를 세우고 문풍을 진작시킨 촉군(蜀郡)의 수령을 가리키며 유화(儒化)는 유교로 교화하는 일을 말한다.

일제강점기 중심정. [사진=사호정 제공]

◇ 흑백사진 한 장으로 남은 역사
이웃 고을의 활쏘기를 통해 추정되는 군자정과 달리 일제강점기 중심정(中心亭)은 그나마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남겨 괴산의 활쏘기 역사를 전한다.

충북궁도협회가 1997년 발간한 『충북국궁사』에 따르면 중심정 사진 속에는 당시 사두였던 장근칠(1880~1952년)의 만작 모습이 담겨있다. 괴산읍 서부리 수진교 옆에 있었던 사정에는 사원인 듯한 두 명이 앉아 장근칠을 바라보고 있다. 그 위로 ‘中心亭’이라는 한자 현판이 선명하다.

장근칠의 증손인 장형일이 보관하고 있던 사진으로 청주에 거주하는 장무일을 통해 알려졌다. 김서응, 김태영, 김영규, 이봉현 등이 중심정 사원으로 전해지고 시동(矢童) 조태원의 이름도 회자된다. 이 가운데 김서응은 중심정의 마지막 사두였으며 이봉현은 현 사호정 2대 사두 이해청의 조부다.

[드론촬영=안한진]

중심정에 대한 기록은 괴산군수였던 안창렬(1847~1925년)의 목판본 시문집 『동려문집(東旅文集)』에서도 찾을 수 있다. 활터라는 언급은 없지만 시에는 ‘초여름, 일산 어른 안효긍과 함께 중심정에 올라 중심정이 고을의 시냇가에 있음을 함께 읊다(初夏, 登中心亭與逸山安丈孝兢共賦亭在郡角溪上)’라는 표제가 붙어 서부리 수진교 옆에 있었던 중심정과 같은 정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안창렬이 괴산군수로 재임한 시기는 19세기로 중심정의 역사도 이 시를 통해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 위엔 청산이요 성 아래엔 시내라                    城上靑山城下溪
온 집의 울타리가 물의 동서에 있네                    百家籬落水東西
춘삼월 문 닫아걸고 꽃피는 일 잊었더니              三春閉閤忘花事
사월에야 누각에 올라 새소리 듣노라                  四月登樓聽鳥啼
비가 안개 먼지 씻어내 온 시내가 맑으니             雨洗烟塵全壑淨
버들 우거진 깊은 길을 지팡이 짚고 간다             逕深楊柳一筇低
눈앞에서 승평의 즐거움 실컷 맛보는데               眼前剩得昇平樂
서쪽 들에 들밥 내가는 아녀자를 낮닭이 쫓아간다 饁婦西郊趁午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863년 유계당(柳溪堂)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공부한 안창렬은 1883년 친군좌우영(親軍左右營)이 설치되자 문안(文案)으로 추천받아 관직에 올랐다. 갑신정변 때 어가를 호종(扈從)한 공로로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가 됐고 이후 문경, 영천, 하양, 이천, 인제, 흡곡 등지의 수령을 지냈다. 1894년 부친상을 마치고 다시 괴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쳤다. 『동려문집』은 동생 안경렬이 주도하고 김세락·이중균 등이 유고를 교정해 1927년 판각에 착수해 1932년 간행됐다.

1930년대 전조선궁술대회 개최를 알리는 동아일보 광고(왼쪽)와 조선중앙일보 기사.

중심정 사진이 촬영됐던 1930년대 신문기사에는 또 다른 활터 사호정(射虎亭)도 확인된다. 1931년 10월4일 동아일보에 괴산의 활터에 대한 기사가 처음 등장하지만 활터 이름은 없다. 이후 1933년 6월24일, 7월2일·3일·5일자 동아일보 광고와 6월23일자 조선중앙일보 기사에 7월17~18일 양일간 제2회 전조선궁술대회를 사호정에서 개최한다는 내용이 게재돼 있다.

현재 사호정에는 당시 사호정을 기억하는 이들이 없다. 때문에 중심정과 같은 활터인지 다른 활터인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충북국궁사』는 중심정 사진을 전했던 장무일의 말을 빌어 경상도·전라도 등 전국에서 괴산으로 와서 대회를 치루기도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중심정이 주최한 궁술대회 신문기사는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어 중심정과 사호정이 하나의 활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30년대 중심정과 사호정 등이 확인되는 괴산의 활쏘기는 이후 1970년대 권희탁 군수가 사정을 재건할 때까지 흔적이 끊긴다. 아마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활쏘기가 이어지지 못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정 재건 이후 군청 직원을 중심으로 한 활쏘기는 우암정에서 집궁했던 김문웅 접장이 1986년 괴산으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몇몇 사람이 모이고 이듬해에는 도민체전에 국궁이 채택되면서 군청도 본격적인 지원에 나서 오늘날 사호정이 탄생하는 단초가 된다. 조선 말기 군자정은 물론 일제강점기 중심정·사호정과 단절된 채 1987년 신생 활터로 아쉽지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복원한 사호정 재건 사정. [사진=한정곤 기자]

현재 사호정은 권희탁 군수가 재건한 사정이 있었던 동산터널 오른쪽 아래 북쪽의 동진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1980년대 공설운동장 축구장에서 과녁을 옮겨다니면서 활쏘기를 했던 더부살이 생활을 거쳐 1996년 8월 2000평 부지에 슬라브 단층 사정 건물을 세웠고 지난 2001년 2층으로 증축까지 마쳤다. 원래 군유지로 논이었던 부지는 강원석이라는 사람에게 임대되고 있었지만 사호정 사원들이 그를 설득해 착공 이전부터 임시 사대와 과녁을 설치하고 습사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입구 오른쪽에는 재건 사정도 복원해 사호정과 함께 읍취취(挹翠樓) 현판을 걸었다. 읍취루는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시대 괴산군수가 유숙했던 현 괴산경찰서 자리에 있었던 2층 누각으로 전해진다. 송강 정철이 이곳을 지나던 중 누각을 보고 읍취루라는 이름과 시문을 지었다고 한다.

사호정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현판은 서예가 서봉(西峯) 김사달(金思達: 1924~1984년)의 글씨다.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서봉은 국민학교만 수학했지만 초·중등학교 교원, 의학박사, 대학교수, 보건행정가, 문교정책가, 정치인, 서화가, 문필가, 체육인(태권도 명예 5단) 등으로 기합술과 최면술까지 다양한 발자취를 남긴 기인으로 알려진다. 40여권의 저서, 200여편의 논문·평론, 수백 편의 수필, 100여개의 비문과 현판서, 수백 점의 서화 등을 남겼다. 특히 서예는 국전 심사위원까지 역임한 당대 명필로 평가되고 있다.

◇ 이진훈 명궁이 심은 한 촉의 연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점심시간에 이르러서야 보슬비로 바뀌어 내려앉는다. 드론을 날리지 못해 안절부절하던 안한진 접장의 얼굴도 밝아진다.

연못엔 하늘을 향해 펼쳐진 연잎들이 모든 빗방울을 받아내겠다는 듯 물방울을 담고 또 쌓인 무게를 이기지 못하면 고개를 숙여 떨구기를 반복한다. 빗방울을 삼킨 연못이 동그란 원을 그리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도 이젠 세월을 따지게 된다. 거주 공간이 아파트로 일반화되면서 빗방울 듣는 소리마저 옛 추억으로 희미해진다.

동행한 황학정 이지후 여무사는 사호정의 첫인상을 “과녁이 왜 이렇게 가까워요?”라는 말로 대신한다. 사호정 김순영 여무사는 사람 좋은 미소로 “연못이 주는 효과”라고 설명한다. 연못을 넘겨야 하는 부담감보다는 오히려 과녁이 더 가깝게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김순영 여무사는 “처음 방문 습사할 경우 살이 무겁에 이르지 못한 채 연못에 빠지기도 한다”고 덧붙인다. 여기에 사대를 향해 10~15도가량 기울어진 과녁 주변의 무겁 경사도 착시현상을 보탠다. 기울어진 무겁으로 살이 떨어지는 지점이 확연하다.

김순영 여무사가 사대에서 과녁을 보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br>
김순영 여무사가 사대에서 과녁을 보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사호정이 자랑하는 사대와 과녁 사이의 연못은 사정 준공 이후 몇 년이 지난 1990년대 조성됐다. 예전 논이었던 탓에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물이 고여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공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연못 가에 영산홍과 창포를 둘렀고 가운데 섬에는 두꺼비 형상의 돌로 조경을 마무리했다. 물속에는 한때 금잉어도 키웠지만 농약이 유입돼 폐사하고 이후 쏘가리를 넣기도 했지만 이번엔 수달 사냥터로 변해 더 이상 물고기를 넣지 않는다고 한다. 애초 나무였던 다리는 썩어 철제로 바꾸었다는데 운치를 떨어뜨린다. 그래도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철 풍경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연꽃은 이진훈 명궁이 한 촉을 가져다 심은 것이 퍼지고 퍼져 오늘날 사호정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연(蓮)이 못을 가득 메우기도 했지만 이끼가 너무 많아 줄였단다. 관리의 번거로움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방인의 눈에는 못내 아쉽다. 못을 뒤덮은 연잎과 가느다랗게 오른 줄기 위로 탐스러운 연꽃까지 기대했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활터에서 접하는 연은 조금 묘하다. 사대에서 과녁을 바라보는, 여느 활터와는 차원이 다른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만이 전부가 아니다.

연꽃은 불교경전 『무량수경』에서 정토에 생명을 탄생시키는 화생(化生)의 근원으로, 『아미타경』에서는 극락정토를 가리킨다. 물 위에 핀 연꽃은 깨달음을, 물속에서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연은 세속의 중생으로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석가모니가 인도 영취산에서 설법 중 깨달음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대중에게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웃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를 비롯해 석가모니 탄생 때 마야 부인 주위에 오색 연꽃이 만발했고 태어난 직후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있을 때에는 땅에서 연꽃이 솟아올라 석가모니를 떠받들었다는 등 수많은 연꽃 관련 설화도 전한다.

[드론촬영=안한진]

◇ 활쏘기와 불교의 인연
이진훈 접장의 본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불교를 상징하는 연이 활터에 뿌리를 내린 데에는 불교와 활쏘기의 각별한 인연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실제 석가모니는 태자 시절 활쏘기를 즐겼고 강궁(强弓)을 사용한 명궁으로 기록돼 있다. 싯다르타 태자가 야소다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벌인 활쏘기 시합은 대표적이다.

예로부터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사람을 사위로 맞았다는 야소다라의 아버지 숩빠붓다왕의 제안으로 싯다르타는 500명의 건장한 사꺄족 청년들과 경쟁한다. 이때 사꺄족이 중요시하는 활쏘기가 무예과목으로 선정됐고 싯다르타는 사당에 보관돼 있던 할아버지 시하하누의 활을 부친 숫도다나왕으로부터 건네받는다. 시하하누 이후 누구도 시위를 얹지 못한 강궁이었다. 조계종이 발간한 『부처님의 생애』(2010년)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활을 받아든 태자는 단숨에 활줄을 걸었다. 그리고 가볍게 몇 번 튕겨보고는 힘차게 시위를 당겼다. 굉음을 일으키며 번개처럼 날아간 화살은 10구로사(1구로사는 약 2km) 거리의 쇠북을 관통했다. 놀란 사꺄족들이 달려가 보니 화살이 떨어진 곳이 깊이 패여 있었고, 그 아래에서 맑은 샘이 솟아올랐다. 경탄을 금치 못한 사꺄족들은 그 후 그 샘을 화살샘이라 불렀다.”

무예를 겨루는 싯다르타 태자가 활을 쏘고 있는 벽화. 2~3세기, 카라치박물관, 파키스탄.

불교경전 곳곳에서도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비유의 상징물로 활과 화살을 내세운다. 불교에서 진정한 적은 마음에 일어나는 번뇌와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이다. 이때 활·화살은 형태가 있는 유형의 무기라기보다는 형태가 없는 무형의 마음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증일아함경』에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루기 전 마왕 파순(波旬)과 대적하기 위해 “인자(仁慈)의 갑옷을 입고 손에는 삼매(三昧: 잡념을 버리고 한 가지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의 활과 지혜의 화살을 들고 준비”하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불소행찬』에는 아름다운 암마라녀에 비구들이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뜻으로 “정진의 활과 지혜의 날카로운 화살을 쥐고 정념의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섯 가지 탐욕과 결사항전해야 한다”고 석가모니는 가르친다.

심영신 숭실대 사학과 교수는 ’활과 검의 불교적 상징과 미술 표현‘(숭실사학 제41호, 2018년)에서 “불교에서 활과 화살은 삼매와 정진, 지혜, 자비 등으로 비유되고 있다”면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의 과정에서 마음의 자세를 굳건히 하고 선명한 지혜를 갖춰야 하는 까닭에 이를 무기의 파괴력에 빗대어 비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대에서 과녁을 바라본 사호정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부처를 뜻하는 한자 ‘불(佛)’ 자만으로도 불교와 활쏘기의 특별한 관계는 증명된다. 김삿갓은 파자시(破字詩)에서 “신선은 곧 산(山) 사람이요, 부처는 사람이 아니다(仙是山人佛不人)”고 읊었다. 사람 ‘인(亻)’ 변에 아니 ‘불(弗)’을 ‘사람이 아니다’는 뜻으로 풀어낸 것이다.

그러나 아니 ‘불(弗)’을 파자하면 활 ‘궁(弓)’과 움직일 ‘별(丿)’, 세울 ‘곤(丨)’으로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온다. 막대를 떨어뜨리는 모양 또는 화살이 나가는 모양이다. 사방으로 퍼트리는 모양을 본 떠 만든 상형자로 사람에게 널리 전하라는 의미를 갖는다.

‘별(丿)’과 ‘곤(丨)’을 화살로 보는 해석도 있다. 별은 휘어진 화살, 곤은 곧고 바른 화살이다. 휘어진 화살을 곧고 바른 화살과 같이 편다는 의미다. 어떤 이는 사람(亻)이 활(弓)과 화살을 내려놓아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한다.

그렇다면 사람 옆에 활과 화살이 놓여 있는 형상, 즉 활쏘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가장 단순한 해석은 어떨까.

사호정의 연꽃을 굳이 특정 종교와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 그저 연꽃 피는 여름과 싹이 돋는 봄을 묘사한 천자문 아흔다섯 번째 글 ‘도랑의 연꽃은 빛이 또렷하고 동산의 잡초는 뻗어 우거졌다(渠荷的歷 園莽抽條)’는 문장만으로도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천자문 인문학』의 풀이처럼 여기에는 군자의 삶과 실천이 비록 천하고 보잘것없어도 군자다움을 찾는 눈과 마음을 항상 지녀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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