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쏘기 불모지 경북 유일 조선 시대 활터…포항 권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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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 불모지 경북 유일 조선 시대 활터…포항 권무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06.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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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⑬ 왜구 침략 맞서 관(官)이 주도하고 민(民)이 참여한 무정(武亭)
포항시 흥해읍 권무정 전경. [사진=안한진]

단 한 번을 찾았는데도 어딘가 익숙하고 친숙한 도시가 있는가 하면 여러 차례 방문을 해도 갈 때마다 여전히 낯선 도시가 있다. 음식·언어 등 문화적 영향과 권위주의 시절 정치·제도권으로부터 강요당했던 후천적 교육의 산물일 것이다.

굳이 피하지 않았고 피할 이유도 없었지만 경상북도와는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다. 가본 곳이라고 해야 대구·포항·경주가 고작이다. 출장 목적 이외에 여행지로도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여행을 통해 채우고 싶었던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무언가를 그곳에서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친척은 물론 친분이 있는 지인조차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활터를 찾아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하는데 같은 경상도인 경상남도와 달리 경상북도의 활터 대부분은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 몇 가지 조건은 100년의 역사를 기본으로 옛 사정·현판·편액의 보존·전래 여부 등이다.

사실 경상북도는 조선 시대 활쏘기의 불모지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 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활터라고 해야 포항 흥해의 권무정이 유일하다. 대구를 포함하면 권무정보다 조금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관덕정이 있을 뿐이다. 동해안을 끼고 일본과 인접해 왜구의 노략질이 잦았을 지리적 조건을 감안하면 의외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권무정마저 엄밀히 따지면 관(官)이 주도하고 민(民)이 참여한 활터이고 관덕정 역시 조선 시대 무과 시험제도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으로 출발했으니 다른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순수한 의미의 민간 활터와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이는 무예를 부정적으로 여겼던 성리학자들의 사상이 민간으로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드론촬영=안한진]

학계에서는 소위 주류 성리학의 계보를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정리한다. 이후 이황(1501~1570년)의 영남학파와 이이(1536~1584년)의 기호학파가 주류 성리학의 계보를 이어받는다. 시기적으로는 임진왜란 발발 직전이다. 그런데 이황과 이이에게서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활쏘기보다 투호(投壺)를 통한 신체단련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박근 서울대스포츠과학연구소 교수는 올해 5월 전통활쏘기연구회 춘계 세미나에서 발표한 ‘조선의 궁술에 나타난 명궁, 송당 박영에 대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활쏘기가 도학전승 텍스트로 등장한 것은 김숙자의 학규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김종직의 향사례로 인해 텍스트로서의 활쏘기는 전국적으로 보편화되게 된다. 그렇다면 김종직 이후에는 도학파의 전승수단으로서 활쏘기의 역할은 사라진 것일까. 소학파의 경우는 도학전승 텍스트로서의 활쏘기의 역할은 급격히 약해지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 이상 텍스트로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학』만으로도 충분히 도학전승의 텍스트를 담지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퇴계의 경우 활쏘기는 더욱 관념화되어 투호라는 최소화된 양식으로 축소되기에 이르게 된다. 경(敬) 공부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효과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비록 도학 전승의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했지만 주류 성리학 계보에서 김종직 이후 활쏘기는 급격히 쇠퇴하고 급기야 이황·이이에 이르러서는 활쏘기보다 투호를 더 선호했다는 설명이다. 사림세력이 중앙의 정치 무대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가 조선의 9대 임금 성종 때였고 물꼬를 튼 사람이 김종직과 김굉필이었다는 점에서 활쏘기 쇠퇴에 대한 또 다른 단초도 읽혀진다.

신윤복의 임하투호(林下投壺).

◇ 주류 성리학자들의 투호 보급에 밀린 활쏘기
투호는 마당이나 마루에 항아리를 놓고 화살을 던져 항아리 안에 누가 더 많이 넣는지를 겨루는 놀이로 삼국시대부터 유행했음이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된다. 고려 시대 예종 때에는 송나라 황제가 투호를 보내주자 의식을 정하고 그림으로 올리도록 하면서 의식으로 발전한다. 다만 왕실이나 사대부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지는 않았다.

그 후 원나라와의 교류 과정 속에서 일부 유학자들이 투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유교를 국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전기 왕실을 중심으로 종친연이나 기로연에서 화목을 목적으로 투호 놀이가 자주 행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광섭의 ‘조선 후기의 변화된 투호격과 여가 취미 양상 연구’(『대동문화연구』 제84집)에 따르면 투호 놀이가 전국으로 퍼진 것은 16세기로 보인다. 16세기는 이황의 도산서원 건립으로 비롯된 서원의 정착과 이이의 향약보급 운동, 지방사림의 중앙진출 등이 이루어진 시기다. 이황과 이이는 서원·향교 등에서 투호를 권장했다. 이황은 투호가 예악(禮樂)을 겸한 것으로 군자의 심체평정(心體平正)을 살필 수 있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도록 경계할 수 있다고 했다. 이이는 독서의 여가에 거문고 연주, 활쏘기, 투호를 즐기되 적당한 때에 하라고 했다. 이때부터 투호놀이는 서원·향교 등에서 여가시간에 하는 놀이로 정착됐고 심신수양과 덕성평가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황의 시에는 투호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禮樂從來和與嚴 예악은 원래 부드러움과 엄함에 유래하니
投壺一藝已能兼 투호 한 가지 기예에 이를 모두 갖추었네
主賓有黨儀無傲 주인 손님 편 갈라도 행동이 공손하지
算爵非均意各厭 성적은 다르지만 불평하지 않는다네
比射男兒因肆習 활쏘기와 비슷하니 남자들이 연습한다
其爭君子可觀瞻 그 다툼이 군자다우니 볼만도 하지
心平體正何容飾 마음은 평안하고 몸은 바르니 꾸밈이 필요 없네.
一在中間自警潛 경이 그 안에 있으니 스스로 조심하지

이에 따라 육수화는 ‘조선 시대 사대부 투호례의 변화양상과 그 예교적 함의’(『한국교육사학』 제42권 제4호)에서 “퇴계와 율곡 또한 투호를 공부의 일환 혹은 그 연장선상으로 여겼던 만큼 지역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투호례는 사대부의 품격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심신수양 혹은 향례의 하나로 거행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사대부를 중심으로 투호회가 결성되고 각종 시문(詩文)과 서화(書畫)가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투호는 대중적 문화로까지 자리 잡게 된다.

육수화는 “조선 중기까지 투호는 분명 심신의 수양과 덕성의 함양이라는 예교적인 측면이 한층 더 강조됐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이전에 비해 투호는 상대적으로 유희적인 요소가 한층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이를 비판하며 투호례의 풍류를 고수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중화될수록 그 흐름은 유희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분석한다.

이황과 이이를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유학자들에게 투호가 권장되고 유행하면서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서는 활쏘기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권무정 사대에서 습사하고 있는 배진호 접장(왼쪽부터), 최성숙 여무사, 진원대 접장, 최일규 직전 사두. [사진=한정곤 기자]

◇ “공자도 활쏘기를 했거늘…”
반면 왜구의 노략질에 대비해야 했던 경상도 목민관들은 이를 개탄하는가 하면 조정에 활쏘기 장려를 위해 무과시험 시행을 청했다. 『조선왕조실록』 등 옛 기록에는 이 같은 경상도 지방의 무예, 즉 활쏘기 경시 풍조에 대한 목민관들의 고민이 엿보인다.

『광해군일기』 130권(1618년 7월14일)에는 “올해 7월11일 경상 감사 박경신(朴慶新)이 인견할 때 ‘본도가 섬 오랑캐와 서로 접하여 있는데 사람들이 무(武)를 익히지 않아 극히 한심합니다. 위에서 혹 과거시험을 시행해 용동(聳動)시키는 일을 행하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뢴 일을 결정짓지 않으셔서 품달(稟達)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고 적고 있다.

또한 조선 중·후기 최고의결기관이었던 비변사에서 처리한 사건을 기록한 『비변사등록』에는 1630년대 후반 전라도 감사였던 정세규(鄭世規·1583~1661년)가 이전 부임지였던 영남에서 ‘양반들이 무관이 될 의지가 없다’고 언급한다. 특히 그는 무과의 길을 택한 양반들은 다른 양반들에게 배척당한다고까지 했다.

과거시험을 시행함으로써 주요 과목이었던 활쏘기를 권장하려던 목민관들의 노력과 달리 오히려 무과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배척당한다는 대목은 이 지방에서의 활쏘기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드론 촬영= 안한진]

결국 18세기 말 영남 지방에서 실시한 무과시험에 응시자가 적은 것을 확인한 정조는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린다.

“영남은 지역이 큰 도다. 그런데 나라의 행사인 과거에 참여하는 사람은 다른 도의 큰 고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본도가 공자나 맹자의 고장처럼 학문이 왕성한 고을이라고 말하지 말라. 활을 쏘는 무예가 천한 것이 아니다. 공자도 활쏘기를 한 것을 보면 이를 좋아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문무(文武)를 다 같이 쓰는 것은 국가를 장구하게 보전하는 방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시험을 보지 않아도 본디부터 잘하는 것은 성인이고 시험을 쳐야 잘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신칙하되 기한을 엄히 정하여 독촉하지도 말고 포기하게 내버려 두지도 말게 하라. 그리고 고을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으면 수령은 감영과 병영에 보고하고 감사와 병사는 그 사람을 불러 시험을 보인 다음 재주와 무예가 뛰어난 사람은 관서 지방의 예에 따라 장계로 보고하게 하며 지체가 좋은 무변(武弁)으로서 앞으로 진취할 수 있는 능력이 넉넉한 사람은 특례로 권장하도록 하라.” (『정조실록』 39권. 1794년 2월15일)

정조의 교지에 앞서 1761년(영조37년) 경상도 흥해군수로 부임했던 김영수(金永綏)도 박경신·정세규와 같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흥해는 반만년 동안 호수였지만 동편의 곡강(曲江) 어귀가 절단된 산맥으로 호수의 물이 흘러들러 평야를 이룬 곳이다. 가뭄에도 물 걱정 없고 습기가 많아 항상 바다와 함께 흥한다 해 이름 지어졌다. 그러나 바다를 접한 변방으로 관군이 있었지만 수적인 열세로 왜구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사흘이 멀다 하고 쳐들어온 왜구에게 곡식을 노략질당하고 주민이 살상당하는 고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김영수 군수가 부임 첫해부터 고을 장로들로 하여금 인재를 뽑아 학문을 권하도록 학당을 세우고 활터를 세워 활쏘기를 연마하도록 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활쏘기 경시 풍조를 개탄하거나 조정에 무과시험 시행을 재촉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넘어 스스로 민병을 양성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활터가 오늘날 권무정(勸武亭)으로 현판을 바꿔단 권무당(勸武堂)이다.

김영수 군수가 권무당 창건 2년 뒤 친필로 작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권무당(勸武堂記)’에는 활쏘기가 경시되고 있는 풍조를 한탄하면서 인재 양성에 있어 문무(文武)를 가릴 수 없다고 적혀 있다. 또한 바다와 접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 무인 양성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창건 배경과 목적도 기록돼 있다. 특히 재주가 있어도 게을러 스스로 훈련을 하지 않아 활터를 세우고 시상제도를 마련해 동기를 부여한다며 운영 방법과 궁사들의 마음가짐에 대한 당부까지 담겨 있다.

김영수 군수의 친필 권무당기. [사진=한정곤 기자]

“옛날 택실에서 무사를 선발하되 반드시 활쏘기를 하였으니 그 활쏘기를 육예(六藝) 중 일례(一藝)로서 군자의 덕행을 관찰하는 바 지금 사례(射禮)가 쇠(衰)하고 문무(文武)의 도가 다르지만 아직 옛것을 본받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즉 무릇 인재를 양육하여 그 재목을 달성하고자 하는 자는 가히 한쪽을 폐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우리 고을이 바다를 낀 신령한 지대로 권무(勸武)의 행정을 더욱 소홀히 못할 것이다. 불민한 내가 이 고을을 맡은 이래로 먼저 권학(勸學)을 염두에 두고 인재를 뽑아 학당에 모으고 장로(長老)에게 맡겨 일과(日課)를 가르치게 하고 세입을 감독하여 그 수요와 공급을 풍족하게 하니 삼자(三者)의 행정이 다사(多事)에게 저버리지 않았다.

이어 여가를 내어 관내의 무사들에 대한 사열을 실시했던 결과 모두 재주는 성취할 만하나 자력으로 그 게으름을 이기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이를 민망히 여겨 계획을 짜서 권장하게 하려니 또한 무술을 익히는 장소가 있어야 뜻이 있는 자가 연습을 할 것이며 시상제도가 있어야 재주있는 자가 분발할 것이므로 고을의 여러 인사들과 의논하여 동전 이백민(二百緡)을 협찬받아 하명자에게 명하여 각처의 사계(射契)에 보조 후 원금은 보존하고 이식(利殖)을 납부토록 하여 매월 일차 궁술대회 때 그 이자 십민(十緡)으로 우수 무사에게 시상을 하도록 하고 또 그에 마땅한 준칙을 정한 후에 비로소 사당(弓術場)을 군성(郡城)의 남쪽 들에 세우니 권무당이 앞으로 백년 동안은 유지될 것이며 이자(利子)로서 매월 시상을 하면 이로 인하여 이 고을 추향자(趨向者)의 의사에 부흥할 것이다.

낙성식을 하던 날 모든 궁사들을 모은 자리에서 내가 말하기를 무술을 연마하여 성공을 거두는 것은 제군들의 몫이니 채찍을 않아도 노력하고 권함을 기다리지 말 것이다. 또 권해도 분발하지 않으면 이는 자포자기하는 자니 내가 어찌 꾸짖겠는가. 다만 무술이란 매우 소중한 것임을 인식하고 부단히 노력해야 좋은 결과를 볼 것인즉 나는 오늘 이 일에 시작을 마련했을 따름이니 제군들은 나의 이 작은 뜻을 깊이 자각하고 유종의 미를 거둔다면 후세 사람들의 바라봄이 있으리라.”

[드론촬영=안한진]

◇논길 끝 곡강천변 현대식 사정(射亭)
여름이 코앞인데도 새벽바람은 떠나간 겨울을 잊지 못하는 듯 제법 쌀쌀하다. 흥해읍을 출발한 자동차가 주택가를 빠져나와 광활한 개활지로 들어선다. 도로 양옆으로 즐비한 논에는 이제 막 모내기를 마쳤는지 까까머리 모양의 어린 모가 물 밖으로 고개를 빼죽 내민다. 군데군데 무리 지은 비닐하우스의 풍경까지 여느 시골 못지않다. 공업도시 포항에서 이런 풍경을 만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곡강천 다리를 건너기 전 논길 오른쪽 허허벌판 멀리 기와를 얹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위협적이기까지 한 권무정 사정이 우람한 자태를 드러낸다.

권무정 사정 전경. [사진=안한진]

고수부지에 들어앉은 권무정은 목조 기와건물을 흉내낸 콘크리트조 2층 건물로 4개 면에서 모두 출입이 가능한 독특한 구조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익공집으로 1층엔 넓은 홀을 조성해 휴게공간과 북쪽 출입구에 작은 궁방을 마련했다. 사대 위에는 붉은 채양을 설치해 햇볕을 가려준다. 2층은 넓은 궁방과 회의실 겸 휴게공간이 또 있다. 이곳에는 권무정의 역사를 간직한 ‘권무정기’를 비롯해 각종 편액들과 각종 대회에서 수상한 우승기·상장 등이 보관돼 있다.

사대는 정동쪽을 향한다. 아침 9시 이전에는 꼼짝없이 해를 마주보아야 한다. 인근에 야산 하나 없이 사방이 트인 개활지다 보니 바람도 각오해야 한다.

왼쪽으로는 곡강천이 흐르고 오른쪽엔 약 2m 높이로 쌓아 올린 자전거도로와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얼핏 방향만 다를 뿐 사대에 서면 전남 담양의 총무정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대에서 과녁까지 양옆으로는 아카시아나무와 메타세콰이어가 일렬로 빽빽하다. 아카시아꽃이 피면 하얀 벽을 쌓듯 만개한 꽃무리의 장관을 보지 못한 게 아쉽다.

오른쪽 메타세콰이어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이른 아침 과녁쪽에서 직선으로 사대 방향을 향하는 해가 점차 남쪽으로 기울면서 오전 9시쯤이면 나무 끝에 걸려 그늘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제방 위로 조성된 산책로를 걷는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사대에서 바라본 과녁. [사진=한정곤 기자]

한 순을 낸 후 연전길에서 접한 과녁이 여느 활터와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붉은색 홍심 위의 검정색의 한 일(一)자가 검정색이 아닌 붉은 색이다.

장종구 사두는 “활쏘기는 무관의 고유 영역으로 문무(文武) 모든 제후가 아닌 무관제후를 지칭한다”면서 “따라서 무관은 미후(麋侯), 즉 붉은 순록 가죽(홍심 과녁)을 도입하며 김영수 군수는 무과급제 후 권무정을 창건해 홍심 과녁을 도입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검정색 한 일(一)자 선은 문(文)을 뜻하고 붉은색 한 일(一)자는 무(武)를 뜻해 활터를 구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총무정이 담양의 수많은 정자들 가운데 유일한 무정(武亭)이듯 권무정 또한 포항의 유일한 무정이라는 점에서 지형적으로 닮은 꼴 외에도 공통점이 느껴진다.

홍심 위의 한 일(一)자가 붉은 색인 권무정 과녁. [사진=한정곤 기자]

◇ 제주 관덕정·한산섬 제승당의 김영수 군수
권무정 사정 남쪽 옆에는 4면을 돌담으로 둘러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방풍판을 댄 아담한 맞배지붕 목조건물의 정자가 있다. 권무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당 청덕사(淸德司)다. 안에는 김영수 군수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유응환 군수의 위패도 함께 봉안돼 있다.

청덕사 사당 오른쪽 마당에는 흥해군수 시절 업적과 선정을 베풀었던 내용이 기록된 김영수 흥해구제기적비(興海九堤紀蹟碑)를 비롯해 군수 유응환 선정거은비(善政去恩碑), 군수 이응권 선정비(善政碑) 등 역대 흥해군수들의 선정비와 불망비 6개가 나란히 서 있다.

권무정을 창건한 김영수(1716~1786년) 군수는 안동이 본관으로 수안군사(遂安郡事)를 지낸 김칠양(金七陽)의 후손으로 의영고직장 김홍석(金弘錫)의 아들이다. 어릴 적 이름은 영적(永績), 자(字)는 중약(仲若)이다. 갑자무과(1744년)와 병인중시(1746년)를 거쳐 가선대부에 올랐고 흥해군수와 김해부사, 전라우수사·좌수사를 거쳐 함경도병사, 제주목사, 충청도 병사를 역임하고 수군통제사로 부임해 통영 한산섬에서 순직했다. 그의 순직 소식을 들은 흥해군민과 권무정 궁사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청덕사를 세우고 영정을 봉안해 매년 음력 9월9일 중양절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청덕사 전경. [사진=안한진]

전국 활터를 유람해본 활꾼이라면 김영수라는 이름이 권무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제주시 관덕정 중앙 천장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걸려 있는 ‘탐라형승(耽羅形勝)’이라는 편액이 바로 그의 글씨다.

특히 1593년 충무공 이순신이 창건한 뒤 소실돼 중건됐지만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소실돼 1739년 조경 통제사가 본래의 모습으로 중건한 경남 통영 한산섬의 제승당(制勝堂) 현판 역시 1786년(정조10년) 제141대 통제사 재임 당시 그가 썼다. 그가 쓴 현판은 크기가 어마어마해 제승당 처마에 걸지 못하고 현재 내부에 벽면을 가득 채우고 세워져 있다.

김영수 군수는 창건 당시 권무당 현판도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전해지지는 않아 사실 확인은 어렵다.

벽강 김영룡의 현판. [사진=안한진]

현재 사정 2층 높다란 처마 밑에 걸린 현판은 벽강(璧岡) 김영룡(金永龍)의 글씨다. 그는 포항 송학정에서 2007년 집궁한 활꾼으로 단순 취미로 붓을 잡은 20대부터 40여년 서예 인생을 걸어왔다.

장종구 사두는 “하루는 벽강이 새로운 사정으로 이사를 했으니 현판도 새로운 것으로 걸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얼마 뒤 판각까지 한 현판을 가져왔다”고 새로운 현판을 걸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이에 대해 벽강은 “권무정의 새로운 사정 준공을 축하하기 위해 내가 가진 재주를 활용해 뭔가 선물이라도 하고 싶었다”면서 “다행히 경주에 서각하는 친구도 있고 해 기증하게 됐다”고 말한다.

우송 신대식의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앞서 권무정을 지켰던 현판은 1997년 우송(又松) 신대식(申大植·1918~1985년)이 쓴 작품이었다. 현재 권무정 2층에 보관돼 있다. 청덕사에 걸린 현판 역시 그의 글씨다. 소아과 의사였던 그의 작품에 대해 화가 박경숙(큐레이터)은 지난해 경북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당대(唐代) 이후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했던 안진경체의 특성인 남성적인 힘과 균제미(均齊美), 즉 힘과 운치가 있는 필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이후 차츰 추사의 글씨에 매료돼 점차 ‘미’를 거부하는 독자적인 서체 연구에 힘썼다”고 평가했다.

우송의 현판 이전에 또 다른 현판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사진으로도 남아있지 않다. 특히 이 현판은 2007년 즈음 도둑맞은 것으로 전해진다. 권무정 사원들은 현판을 훔쳐간 이를 특정하고 있지만 물증은 없고 심증뿐이다. 더구나 그는 몇 해 전 사망해 설사 그가 훔쳐갔다 하더라도 이제는 되찾을 방도조차 사라졌다.

◇ 상가 건물 들어선 옛터…임대수입 재정 도움
권무정과 청덕사가 곡강천변에 자리를 잡은 것은 10년 전인 2011년 5월이다. 당초 흥해읍 남성리에서 창건돼 풍우로 사정이 소실된 1917년까지 습사가 이어졌다. 이후 임시 사정에서 습사를 하던 중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사원들이 흩어졌고 1954년 흥해에서 자영업을 하던 나영달 초대사두가 지방 유지들을 모아 재건했다. 창건 당시 권무당이었던 이름도 이때 권무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87년 남성리 일대의 택지개발로 사정 건물과 청덕사는 그대로 둔 채 망창산 자락으로 옮겨야 했고 이듬해에는 흥해 남산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마산리로 또 밀려나는 등 지금의 현대식 권무정으로 오기까지 숱한 우여곡절도 겪어야 했다.

1990년 집궁한 이정희 고문은 논 한 가운데에 활터 하나 덩그러니 서 있던 남성리 시절을 떠올리며 당시 활쏘기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주변이 온통 논이었던 탓에 죽시가 논에 떨어지면 빨리 수거해야 했다”면서 “고전이 없으면 질퍽한 논길을 따라 가야 했던 연전도 문제였지만 죽시가 망가지는 게 가장 속상했다”고 말한다. 때문에 당시엔 활터 관리인 겸 고전을 두고 있었는데 그는 각궁을 올려주는 역할까지 했단다.

권무정이 있던 남성리 옛터. 두 건물 사이가 사정 자리이고 왼쪽 건물 위치에 청덕사가 있었다. [사진=한정곤 기자]

권무정과 청덕사가 있던 남성리 옛터는 현재 활터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2015년까지만 해도 지역언론과 주민들이 향토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재건된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건물 자체도 워낙 낡고 무너진 곳이 많아 결국 4년여전 도로가 나면서 철거 후 이전해야 했다. 그나마 청덕사는 한국전쟁 당시 반파됐던 옛 사당의 서까래 등 남은 부재라도 활용해 복원했다.

활터가 있던 자리는 두 동의 단층 상가가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91년 집궁한 무릉정에서 1999년 권무정으로 옮겨왔다는 최성숙 경상북도궁도협회 부회장은 두 상가 사이에 사정 건물이 있었고 그 뒤로 청덕사가 있었다고 말한다. 길가로 나온 최성숙 여무사는 남쪽 도로 끝을 가리키며 두 개의 과녁이 서 있던 자리도 일러준다.

옆에서 설명을 듣고 있던 황학정 안한진 접장이 불쑥 “현재 자리에 옛 권무정 터라는 표지석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지금은 물론 먼 훗날 권무정의 옛 자리를 찾는 이들이 있지 않겠느냐는 설명이다.

한양도성에 있었다는 수많은 활터 가운데 백호정·등과정·좌룡정·청룡정·취운정 등 극히 일부만 바위각자로 남아 나머지 활터들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경험했기에 쉽게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욕심을 낸다면 과녁이 있던 자리에도 표지석을 세우면 어떨까 싶다. 아니라면 최소한 사정이 있던 자리에 표지석을 세우고 어느 방향에 과녁이 있었다고 표기한다면 그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옛 권무정 사대가 있었던 곳에서 바라본 무겁 자리. 화살표가 가리키는 붉은 원 지점에 과녁이 있다고 한다. [사진=한정곤 기자]

◇ 김영수의 권무정과 정약용의 『목민심서』
이들 두 동의 상가는 권무정 소유다. 택지개발 이후 권무정 사원을 구성원으로 한 법인을 설립하고 2019년 신축했다. 법인 대표는 2002년 집궁한 이상진 명궁(9단)이다. 이상진 명궁은 “권무정 웃대 사원들이 재산을 많이 물려줬다”면서 “이후 적립은 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이자를 받아 운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권무정 소유 부동산은 이들 상가 외에도 100여평의 현 청덕사 부지와 1500여평에 달하는 논이 있다. 논은 소작을 주고 있어 상가 임대수입과 함께 활터 운영에 재정적인 도움이 되고 있다. 전국 활터 가운데 부동산 수입은 아마도 전주 천양정과 권무정 두 곳뿐이 아닐까. 은근히 부러움과 함께 시샘도 난다.

포항에서의 1박2일 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준 장종구 사두를 비롯해 이상진 명궁과 최성숙 여무사의 따뜻한 인사를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한 번쯤 겪었을, 혹은 들었을, 혹은 읽었을 법한 기시감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약용이라는 이름이 불현듯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쩌면 권무당 창건으로부터 57년이 지나 1881년 완성된 그의 저서 『목민심서』 제8부 병전(兵典) 가운데 제4조 권무(勸武) 편은 김영수 군수와 권무당의 사례에서 가져오지 않았을까.

東俗柔勤 不喜武技 所習有射 今亦不習 勸武者 今日之急務也.
우리나라는 풍속이 부드럽고 조심스러워 무예를 즐기지 않고, 익히는 것은 오직 활쏘기뿐이었는데 요즘은 활쏘기도 지키지 않는다. 무예를 권장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다.

牧之久任者 或至六朞 惴能如是 勸之而民勤矣.
수령의 임기가 오래되는 자는 6년에 이르기도 한다. 그와 같이 될 것으로 생각해 무예를 권장한다면 백성들도 그 권장에 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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