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라”…서북 지역 최고의 거상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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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라”…서북 지역 최고의 거상 이승훈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1.1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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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④ “장사의 흐름을 재빠르게 살핀 다음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남보다 앞서 행동한다”
▲ 남강 이승훈.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④ “장사의 흐름을 재빠르게 살핀 다음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남보다 앞서 행동한다”

[한정주=역사평론가] 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개발해야 할 타이밍은 언제가 가장 적절할까? 시장 경쟁이 치열할 때 아니면 매출과 이익이 하향 곡선을 그릴 때 아니면 경영이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답은 “가장 잘 나갈 때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일푼의 보부상에서 시작해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유기공장을 차리고 다시 유기공장이 평안도 상계를 거의 독점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는 시기에 무역업으로 진출한 이승훈의 사례를 보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 끊임없이 주력 사업을 바꾸는 경영 능력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성장’의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마라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한 평북 정주 출신의 거상 이승훈은 고종 즉위 초인 1864년 태어났다. 그러나 10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먹고 살 길을 찾아 헤매고 다니다 이승훈은 유기(鍮器)를 만드는 평북 정주 유기 마을의 최고 부자인 임일권의 사환으로 들어갔다. 당시 임일권은 유기 제조공장은 물론 유기를 파는 큰 상점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승훈은 아침저녁으로 임일권의 가래침과 요강을 비우는 일에서부터 시작해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공장과 상점을 두루 갖춘 탓에 이승훈은 이곳에서 놋그릇을 제조하는 과정은 물론 장사하는 방법까지 두루 배울 수 있었다.

4년 동안 하찮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은 이승훈의 성실함을 높이 산 임일권은 장부를 작성하는 방법과 상업 문서를 처리하는 법칙을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특히 유기 거래와 외상 수금까지 믿고 맡겼다.

이승훈은 그렇게 2년을 더 임일권 밑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그리고 이제 직접 장사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환의 자리를 박차고 보부상의 길에 나섰다. 이때 이승훈은 임일권에게 외상으로 놋숟가락 한 봇짐을 얻어 보부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참으로 초라한 시작이었다.

보부상에 나선 이승훈은 사환 생활을 하던 때와는 또 다른 시장 풍속과 상업의 이치를 경험했다. 자신이 파는 물품이 어느 지방에서 잘 팔리고 팔리지 않는지 또 비싼 유기를 많이 소비하는 부자 동네는 어느 곳인지에 대한 정보를 얻고 변화하는 세상 풍속과 시장 환경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정주 유기의 명성에다 탁월한 장사 수완까지 지닌 이승훈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적지 않은 재물을 모을 수 있었다. 특히 그는 남과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유기 장사를 했다. 곧 목화 산지로 유명한 황해도 재령, 은율, 신천 지방의 농가들에서 유기를 팔고 대신 목화를 받아 다시 큰 도회지인 평양, 정주 등에 내다 팔아 시세 차익을 남기는 방법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임일권의 상점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도맡다시피 한 이승훈의 처지에서 보면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일궈낸 셈이다.

▲ 오산학교에서 함석헌(맨 오른쪽)과 함께 한 이승훈(왼쪽 옆).

보부상 생활로 그때까지 모아놓은 재물과 자신의 장사 수완을 더하면 평생 경제적 안정과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훈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원래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작은 성공에 만족하면 큰 뜻을 이루기 어렵다.

이승훈은 임일권 밑에서 일할 때부터 장차 주인을 넘어 정주 제일의 유기 공장과 유기 상점을 차리겠다는 큰 꿈을 갖고 있었다. 이승훈은 보부상으로 한창 재물을 쌓아가던 24세 때 자신의 꿈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과감하게 보부상 생활을 접어 버렸다.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자금으로는 사실 제대로 된 유기공장 하나 차리기 힘들었다. 누가 보기에도 정주에서 가장 큰 유기공장을 세우겠다는 그의 계획은 헛된 꿈처럼 보였다.

이승훈은 평안도 일대의 최고 부자였던 철산의 오희순을 찾아가 거액의 자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오희순이 돈을 빌려준 결정적인 이유는 지난 10여 년 동안 보부상으로 평안도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쌓은 이승훈의 현장 경험과 경영 노하우 그리고 시장에 대한 정보 수집과 분석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 공력을 들이지 않는 한 결코 가질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이다.

어쨌든 이승훈은 오희순에게 거금을 빌려 마침내 평북 제일의 유기공장과 상점을 설립했다. 그것은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작은 성공을 과감하게 버렸던 이승훈의 결단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성공이었다.

◇변화를 주도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라
그런데 24살의 젊은 나이에 정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유기공장과 상점을 차린 이승훈의 성공 신화는 불과 7년도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1894년 일어난 청·일 전쟁의 소용돌이가 그의 유기공장과 상점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오희순에게 자금을 빌려 사업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 줄행랑을 놓았다. 오직 이승훈만 오희순을 찾아가 빚을 갚겠다고 약속했다. 큰 곤란에 처한 사람답지 않은 이승훈의 당당한 태도와 신용에 감동한 오희순은 자신의 자금을 무제한으로 가져다 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이승훈은 빠른 시간 안에 유기공장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오히려 전쟁으로 인해 정주의 유기공장이 대부분 파괴되거나 복구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승훈은 어렵지 않게 평안도 일대의 유기 생산과 판매망을 장악할 수 있었다. 화(禍)가 복(福)이 된 셈이다.

그의 사업은 날로 확장되어 평양은 물론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한 진남포에까지 상점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 이승훈은 70만 냥(현재시가 700억으로 추정)의 자본을 움직이는 명실상부한 거상이 되었다.

그러나 평양과 진남포를 드나들면서 또 다른 거대 시장 곧 국제 무역 거래를 목격한 이승훈은 당시 막 조선에 수입되기 시작한 석유와 의약품이 큰 이익을 남길 ‘미래의 성장 산업’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승훈은 항상 “장사의 흐름을 재빠르게 살핀 다음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남보다 앞서 행동하는 것”을 경영의 원칙으로 삼았다.

일단 유기보다 석유와 의약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사업이 더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한 이상 이승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그는 곧바로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고 마침내 석유와 의약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종합무역상사’를 차렸다.

그리고 그가 예측한대로 국내의 석유 수요는 연료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또한 그는 독일상사 세창양행에서 해열진통제이자 말라리아 치료제인 금계랍을 수입해 판매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말라리아가 전국을 휩쓰는 바람에 여기에서도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그 뒤 이승훈은 지물·도자기·건축재료·면포·일용 잡화로 수입 물품을 확대하며 평안도 지역의 상품 유통과 판매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유기 제조와 판매‧유통 사업에서 종합 무역 상사로 사업의 주력을 바꾼 지 불과 몇 년 만에 이승훈은 서북 지역 최고의 갑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결과는 모두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고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하고 변화를 모색했던 이승훈의 경영 능력이 낳은 성공 신화였다.

▲ 서울어린이대공원의 이승훈 동상.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화식열전(貨殖列傳)’편에서 “천하의 사업하는 사람들은 모두 백규(白圭)를 원조로 삼았다”고 적었다. 그런데 백규는 평소 자신은 사업을 경영할 때 이윤과 여상의 계책(計策), 손자와 오자의 용병(用兵), 상앙의 법치(法治)를 좇아 행동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기응변하는 지혜가 없거나 일을 결단할 줄 아는 용기가 없거나 재물을 주고받는 어진 마음이 없거나 지켜야 할 도리를 끝까지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배우고 싶어 해도 자신의 경영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말을 남겼다.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를 갖지 못해 시대의 변화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지 못하거나 시대의 흐름을 읽고도 용기가 없어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하거나 사소한 시장 변동이나 시세의 유행만 쫓아다니느라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훌륭한 경영 방법을 가르쳐 줘봤자 별반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이승훈의 성공 사례는 백규가 말한 경영의 이치와 일맥상통한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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