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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방에서도 몸을 돌려 앉으면 방위가 바뀌고 명암이 달라진다”[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⑩…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⑦
한정주 기자  |  jjoo@iheadlin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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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26  09: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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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의 자화상. 종이에 옅은 채색,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⑩…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⑦

[한정주=역사평론가] 좁디좁은 방 안에 앉아서도 몸을 돌려 앉으면 방위(方位)가 바뀌고 명암(明暗)이 달라지듯이 구도(求道)란 다만 생각을 돌리는 데 있을 뿐이므로 생각을 돌리면 따르기 않는 곳이 없고 미치지 못할 곳이 없다고 한 이용휴의 글 또한 관점의 전환과 변환의 이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와 미학적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래 묵은 살구나무 아래에 작은 집 한 채가 있다. 방에는 횃대며 시렁과 안석이며 책상 등속이 3분의 1를 차지한다. 손님 몇 사람이 이르기라도 하면 무릎을 맞대고 앉아야 하는 너무도 협소하고 누추한 집이다. 허나 주인은 아주 편안히 여기며 독서하고 구도(求道)할 뿐이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 하나의 방에서 몸을 돌려 앉으면 방위(方位)가 바뀌고 명암(明暗)이 달라지네. 구도(求道)란 다만 생각을 돌리는 데에 있지 생각을 돌리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네. 자네가 나를 믿는다면 자네를 위해 창문을 열어 주겠네. 그러면 한 번 웃는 사이에 이미 밝고 드넓은 공간에 오르게 될 것이네.” 이용휴, 『혜환잡저6』, ‘행교유거기(杏嶠幽居記)’

그렇다면 도대체 보이는 것 너머까지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은 어떤 경로와 방식을 통해 구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통찰력을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경계와 사이(際)’라는 미학의 문제로 연결된다. 실재(實在)와 진상(眞像)은 어떻게 인식할 수 있고 올바르고 참된 견식(見識)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진지한 탐구와 대답이 ‘경계와 사이의 미학’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먼저 박제가가 이덕무의 시집(詩集)에 써준 서문에 등장하는 ‘제(際)’의 미학을 살펴보자.

‘제(際)’라는 한자(漢字)는 ‘사이’ 혹은 ‘경계’라는 뜻을 갖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쉽게 말해 글의 소재가 되는 사물 및 대상과 글을 쓰는 작자(作者)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박제가는 이 관계를 ‘제(際)’, 즉 ‘사이와 경계’로 논할 수 있을 따름이라고 하면서 ‘사이와 경계’란 천지 자연 및 우주 만물과 사람이 나누어지는 분기점이자 동시에 그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적 관점이라고 설명한다.

“나의 벗 형암 선생 무관 이덕무의 시 약간 수를 직접 가려 뽑아 베껴 쓰기를 마치고 향을 피우고 목욕한 뒤 읽었다. 읽으면서 내내 한숨 쉬며 감탄하였다. 객이 말했다. ‘시에서 무슨 의미를 취하려 하는가?’ 내가 말했다. ‘저 산천을 바라보면 아득하여 끝이 없는데 잔잔한 물은 맑음을 머금었고 외로운 구름은 깨끗하게 떠 있네. 기러기는 새끼들을 데리고 남녘으로 날아가고 매미 울음은 쓸쓸하게 끊어지려 하네. 이런 것이 무관의 시가 아닐까?’

객이 말했다. ‘이는 가을이 올 조짐이다. 그의 시가 진실로 터득하여 표현했다는 말인가?’ 나는 대답했다.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 사이(際), 즉 경계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리되는 것은 하늘이요, 그리될 줄 알고 행하는 것은 사람일세. 하늘과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는 법이니 경계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사람이 나누어지는 경계이면서 안과 밖이 합쳐지는 도(道)이다. 때문에 경계를 깨달으면 만물이 길러지고 귀신의 이치도 알게 되지만 경계를 얻지 못하면 아마득하여 자기 자신과 소나 말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하물며 시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 객이 말했다. ‘그렇다면 시는 무엇을 본받아야 하는가?’ 내가 말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한 것이 모두 시일세. 사계절의 변화와 온갖 사물이 내는 소리에는 나름의 자태와 색깔, 소리와 리듬이 절로 존재하네. 어리석은 자는 살피지 못해도 지혜로운 자는 여기에 말미암는다네. 그런 까닭에 다른 사람의 입술만 쳐다보며 진부한 글에서 그림자와 울림을 주워 모으는 것은 그 본색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일세.’” 박제가, 『정유각집』, ‘형암선생시집서문(炯菴先生詩集序文)’

이덕무의 시를 본 어떤 객(客)이 도대체 그 시는 어떤 의미를 취한 것인가라고 묻자 박제가는 끝을 알 수 없이 아득한 산천과 맑음을 머금은 잔잔한 물, 깨끗하게 떠 있는 외로운 구름과 남녘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와 끊어질 듯 말 듯 쓸쓸하게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모두 이덕무의 시라고 답한다.

그러자 객은 더욱 의아해하면서 그러한 자연 현상은 가을이 올 조짐인데 이덕무의 시가 그 참된 모습과 실재적 이치를 제대로 포착하고 터득해 시에 담았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이 물음에 대해 박제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단지 사이와 경계를 논할 수 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시의 소재와 대상이 되는 자연 현상 및 사물과 시를 짓는 이덕무의 관계는 나누어지는 법이지만 동시에 시적 대상과 작자가 일치하는 그 지점에서 시적 표현과 묘사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사이와 경계’의 미학은 시적 대상과 작자가 분리되는 분기점이자 동시에 일치하는 통합점이 되는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시적 대상과 작자의 시정(詩情)과 시상(詩想)의 분리되기도 하고 통합되기도 하는 바로 그 사이와 경계를 얻게 될 때 글은 지극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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