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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핵심은 구상…글자는 단지 붓끝을 따라 써 내려갈 뿐”[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⑦
한정주 기자  |  jjoo@iheadlin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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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28  08: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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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⑭…자득(自得)의 미학⑦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제 구상(構想)과 구성(構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구상이란 쉽게 말해 글 전체에 대한 일종의 설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구성이란 글을 이루는 여러 부분과 요소들을 어떻게 배열하고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를 따져 글을 하나의 전체(全體)로 완성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몽인은 글쓰기의 핵심은 구상에 있다고 하면서 문장을 지을 때 가장 심혈을 기울여할 것은 글 전체에 대한 구상(構想)이며, 그 나머지는 단지 붓끝을 따라 써내려 가면 될 뿐이라고 말한다. 만약 자신의 머릿속에 글에 대한 전체적인 구상, 즉 설계도가 그려져 있다면 글이란 이미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제목을 정하고 마음속으로 글 전체를 구상한 다음 붓 끝을 놀려 단숨에 써 내려가는 능력”이야말로 문장가의 진정한 자질이자 능력이라고 단언했다.

“박충원은 항상 초고를 쓰지 않고 글을 완성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깊게 생각한 후 종이를 펼쳐 놓고 점 하나를 찍기도 하고, 원을 그리기도 하고, 획을 꺾어 짓기도 했다. 그러면서 혹은 ‘수연(雖然: 비록 그러나)’을 쓰다가 더러는 ‘대저(大抵: 대체로)’라거나 ‘오호(嗚呼)’라는 글자를 써 놓곤 했다. 그렇게 하다가 일단 종이에 또박또박 글자를 써 내려가면 단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글을 완성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글을 지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박충원은 ‘문장을 지을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글 전체에 대한 구상(命意)입니다. 글자는 단지 붓끝을 따라 써 내려갈 뿐입니다.’

또한 나의 할아버지께서도 글을 지을 때 초고를 쓰지 않았다. 크고 작은 사연과 소재들을 재료로 삼아 마음속 깊이 생각하셨다가 종이를 마주하고 앉아 단숨에 글을 완성하시곤 하셨다.

신숙은 책문을 기초할 때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관을 벗어 얼굴을 덮은 채 취한 듯 혹은 자는 듯 하다가 느닷없이 일어나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책문이 절반 정도 이루어지면 또 다시 예전처럼 하고 나서 나머지를 완성했다.

나는 이 세 가지 글 짓는 경우를 모두 따라해 보았다. 그랬더니 크고 작은 사연과 소재들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담아두었으나 안타깝게도 더러는 까먹고 더러는 잃어버렸다. 그래서 제목을 정하고 마음속으로 글 전체를 구상한 다음 붓 끝을 놀려 단숨에 써 내려가는 능력은 세 분에게나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유몽인, 『어우야담』

이수광 역시 “이미 마음속으로 글을 써놓은 사람은 반드시 잘 되지만 손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절대로 잘될 수가 없다”고 하여 글을 쓰기 전에 마음속에서 글 전체를 구상하고 구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이미 마음속에서 수십 수백 번의 생각과 깨달음을 거친 글이라면 구태여 좋은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좋은 글이 나오게 된다는 얘기다.

“양배자는 글을 지을 때 붓을 잡으면 그 즉시 문장이 써진다고 했다. 또한 문장을 다듬고 아름답게 꾸미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그토록 빨리 글을 짓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양배자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손으로만 글을 짓지만 자신은 이미 마음속에서 글을 써 놓는다고 했다. 문장이란 곧 조화라고 할 수 있다. 마음으로 문장을 이루는 사람은 반드시 잘 되지만 손으로 문장을 이루는 사람은 절대로 잘 될 수가 없다. 세상에는 마음으로 글을 짓는 자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문장을 잘 짓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수광, 『지봉유설』, ‘문장(文)’

마지막으로 글쓰기를 장수와 병사의 관계 그리고 병법과 용병술의 이치에 비유해 설명한 박지원의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은 글을 이루는 여러 부분과 요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지극한 글쓰기의 경지, 즉 ‘글의 완성도’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지침으로 삼을 만하다.

또한 여기에는 ‘구상과 구성’ 및 ‘이치와 논리’를 글쓰기에서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또한 그것이 왜 중요한가를 가르쳐주는 단서들이 가득 담겨 있다.

“글을 잘 짓는 사람은 병법 또한 잘 아는 사람이다. 비유하자면 글자는 병사와 같고, 글의 뜻은 장수와 같고, 제목은 맞서 싸우는 나라와 같다. 옛일을 인용하는 일은 전장의 진지를 구축하는 일과 같고, 글자를 묶어 구를 만들고 다시 구를 모아 장을 이루는 일은 대오를 짜 진을 치는 일과 같다. 또 운율에 맞추어 읊고 멋들어진 표현으로 빛을 내는 일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두르는 일과 같다.

문장의 앞뒤가 서로 들어맞아야 한다는 말은 봉화에 해당하고 어떤 사물과 현상을 빌어 표현하는 비유는 유격에 해당한다. 억양을 반복하는 일은 맞붙어 싸워 죽이는 일과 같고 제목의 뜻을 드러내 보인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군을 사로잡는 일과 같다. 짧은 말이나 글로 깊은 뜻을 담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은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일과 같고 글의 여운을 남겨 놓는 것은 전열을 잘 정비하여 개선하는 일과 같다.

춘추전국시대 장평 전투의 병사들은 그 용맹함이 다르지 않고 무기의 예리함 또한 변함이 없었지만 염파가 지휘하면 전투에서 승리하고 조괄이 지휘하면 자멸했다. 따라서 용병술에 능한 장수에게는 버릴 병사가 단 한 사람도 없듯이 글을 잘 짓는 사람에게는 쓰지 못할 글자가 단 한 글자도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장수를 만나면 호미 자루나 창 자루를 들어도 모두 굳세고 사나운 병사로 변하고 헝겊을 찢어 장대에 매달아 깃발로 사용하더라도 새롭고 기품 있는 색채를 띤다. 이와 같은 이치를 터득한다면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는 말도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고 동요나 속담마저도 고상하고 우아한 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글에 능숙하지 모산 이유가 반드시 글자 때문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문장이 우아한지 저속한지,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나 따지는 사람들은 변화에 통달하고 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는 장수와 같다. 이는 마음속에 미리 짜 놓은 계책이 없는 장수와 같아서 갑자기 어떤 제목에 부딪치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성을 대하듯 먼저 기가 질려 마음속에 기억하고 외운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짓는 사람은 항상 스스로 가야 할 길을 잃지 않을까, 문장의 본령과 핵심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근심해야 한다. 스스로 가야 할 길이 밝지 못하면 단 한 글자일망정 써 내려갈 수가 없어 항상 더디고 껄끄러운 병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또 본령과 핵심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단단하게 두루 얽어매어도 오히려 풀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음릉에서 길을 읽자 명마인 오추마(烏騅馬)도 달리지 못하고 수레에 거듭 단단하게 묶어 놓아도 여섯 마리의 노새가 도망가 버린 꼴과 같다. 눈이 흩뿌리는 밤에 채주를 기습하듯 한 마디 말로 정곡을 찌르고 세 차례 북을 울려 성문을 빼앗듯 한 마디 말로 핵심을 뽑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글을 짓는다면 지극한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박지원, 『연암집』, ‘『소단적치』의 첫머리에 붙여(騷壇赤幟引)’

박지원의 이 글은 훌륭하고 적절한 비유를 들어 사색의 글쓰기 곧 글쓰기에 있어서 ‘구상과 구성’ 및 ‘이치와 논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주고 있지만 병법의 이치를 빌고 있기 때문에 해석과 설명을 덧붙이지 않으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먼저 박지원은 글자를 병사, 글의 뜻을 장수, 글의 제목은 맞서 싸우는 나라와 같다고 했다. 한 편의 글은 수많은 병사와 같이 수많은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만약 이들 병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없다면 그들은 군대라고 하기 보다는 오합지졸에 불과할 뿐이다. 개별적인 행동하는 병사들의 총합이 아니라 장수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군대와 마찬가지로 글을 이루는 수많은 글자는 글의 뜻 곧 글의 주제에 따라 써야 할 곳에 따라 알맞게 배열되고 배치되어야 한다.

그래서 글의 뜻(주제)은 병사들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는 장수와 같고, 글자는 장수의 지휘에 따라 이렇게 움직였다가 저렇게 움직이기도 하는 병사와 같은 것이다. 또한 제목은 맞서 싸워 정복해야 할 적국(敵國)이다. 쉽게 말해 제목에 부합하게 글자 곧 언어를 잘 구사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주제)을 읽는 이에게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효과는 글을 쓰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국(敵國)을 공략해 정복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훌륭한 장수를 만나면 호미 자루를 들고 헝겊을 매달아 깃발로 사용해도 모두 굳세고 사나운 병사가 되어 무적의 군대가 되는 반면 아무리 용맹하고 최신의 무기로 무장한 병사라 하더라도 장수를 제대로 만지 못하면 오합지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 쓰는 이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 일상에서 쓰는 하잘것없는 말로도 훌륭한 문장을 지을 수 있고, 아무리 고상하고 우아한 말과 글자를 써도 비루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글에 능숙하지 못한 이유가 반드시 글자 때문만은 아니게 된다.

또한 마음속에 미리 짜 놓은 계책이 없는 장수가 적을 만나면 당황해 이렇지도 저렇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만약 마음속에서 미리 글의 여러 요소 및 부분과 전체적 맥락, 그 속에 담을 이치와 논리를 생각하고 깨달아 얻는 것이 없을 경우, 어떤 제목과 글감(소재)을 접하더라도 이미 기억하고 외운 내용조차 전혀 생각나지 않아 한 줄도 쓰지 못하거나 혹 글을 쓰더라도 어떻게 시작하고 전개하며 끝을 맺을 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만다.

마지막으로 “글을 짓는 사람은 항상 스스로 가야 할 길을 잃지 않을까, 문장의 본령과 핵심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근심해야 한다”는 박지원의 지적은 글을 쓸 때는 반드시 주제(뜻)를 잃지 않고 이치와 논리를 얻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제아무리 단어나 용어를 많이 알고 있고 고상한 제목과 훌륭한 글감(소재)과 탁월한 언어 구사와 뛰어난 문장력을 지녔다고 해도 글의 뜻(주제)이 명확하지 않고 글에 담긴 뜻(주제)을 제대로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이치와 논리를 담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글은 실제 전투에서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오합지졸과 같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글을 썼는지 알 수 없는 횡설수설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군대를 지휘해 적국을 공략해 정복하는 장수처럼 글을 쓰는 이는 마음속에서 미리 계책, 곧 개별적인 글자와 여러 요소 및 부분과 전체적인 맥락(설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구상과 구성’을 세우고 다시 글을 쓰는 과정에서 부딪치게 되는 여러 상황과 뜻밖의 경우에 따라 글 속에 담을 ‘이치와 논리’를 변통(變通)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 만약 “견문과 경험과 지식과 직관과 사색과 글쓰기는 하나”라는 철학이 바로 ‘자득의 묘리’를 구하는 길이라는 필자의 주장을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경우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글을 지으려면 반드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다가 문득 곧 한 순간에 마음속에서 깨달아 얻는 깨달음일 수도 있고 글을 쓰는 것을 나무에 꽃이 피는 것에 비유해 “나무의 뿌리를 북돋아주듯 진실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쏟고, 줄기를 바로잡듯 부지런히 실천하며 수양하고, 진액이 오르듯 독서에 힘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듯 널리 보고 들으며 두루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것을 헤아려 표현한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글이요 사람들이 칭찬을 아까지 않는 훌륭한 문장이 된다”고 한 정약용의 말처럼 얻게 되는 깨달음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한 순간의 깨달음이든 오랜 세월과 노력이 쌓인 깨달음이든 반드시 스스로 깨달아 터득한 것이 있어야 진정 자신만의 글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아 터득한 것이 있는 글은 비록 논리는 투박하고 구성이 거칠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담긴 정신과 가치는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깨달음이란 다른 사람에게서 구할 수도 없고 남에게 알려줄 수도 없어서 오직 “스스로 깨달아 얻을 수 있을 뿐이다”라는 홍길주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번 연재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내게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 한 번은 덕옹(德翁) 상득용(尙得容)이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진실로 훌륭한 스승을 얻었네. 자네의 스승은 정말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치기는 하네만 일단의 묘한 깨달음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비밀로 해서 남에게 일러주지 않는 것이 큰 병통이지.’

덕옹은 무인인 까닭에 그 말이 흔히 정곡을 뚫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말은 거의 나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 같았다. 그러나 묘한 깨달음이 있는 것을 어찌 남에게 알려줄 수 있겠는가? 자기 스스로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와서 배우는 자 또한 오성(悟性)이 없어 성취한 바가 몹시 거친 것을 괴로워했다.” 홍길주, 『수여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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