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울 만한 곳”…박지원 『열하일기』와 이덕무 『서해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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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울 만한 곳”…박지원 『열하일기』와 이덕무 『서해여언』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1.05.17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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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70) 사봉(沙峰)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며
박지원과  『열하일기』
박지원과 『열하일기』

세찬 바람 맞고 서니 몸 가누기 어려워       㢠立罡風不自由
용 비린내 이무기 빛 어지러이 흩날리네     龍腥蜃彩盪難收
때는 무자년 초겨울                           時維戊子冬之孟
찾아간 곳, 조선 땅 가장자리                 行次朝鮮地盡頭
끝없는 바다처럼 마음속 품은 뜻 가득하고   意內盈盈無限海
손가락 거쳐 온 마을 하나하나 가리키네     指端歷歷所經州
어슴푸레 장산곶 한 번 쭉 바라보니          蒼然一攬長山串
칠십 리 솔밭 가없이 떠다니려는 듯          七十里松漭欲浮
『아정유고 1』 (재번역)

[한정주=고전연구가] ‘호곡장(好哭場)’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속 최고의 명문장 중 하나로 꼽힌다.

박지원은 하늘과 땅 사이에 탁 트여 끝없이 펼쳐진 경계 곧 요동벌판을 보고 “한바탕 울 만한 곳이로구나!”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조선에도 요동벌판처럼 한바탕 울 만한 곳이 두 군데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금강산 최고봉 비로봉 꼭대기에서 동해바다를 굽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황해도 장연의 금사(金沙)에서 서해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두 군데 다 지금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북한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을 때나 혹은 독자들과 얘기할 때면 항상 “금사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기에 하필 박지원이 한바탕 울 만한 곳이라고 했을까?”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일곤 했다.

이덕무의 시는 박지원이 말한 바로 그 금사 사봉에 올라 서해바다를 바라보면서 읊은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덕무의 글 『서해여언(西海旅言)』을 보면 마치 이 시의 탄생 배경을 해설해놓은 것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이덕무는 시를 쓰듯 산문을 쓰고 산문을 쓰듯 시를 썼다. 이덕무에게 시와 산문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다른 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조생과 박생 두 소년이 나를 따라와 바닷가 사봉(沙峰)을 유람했다. 사봉은 바다속 모래가 바람에 밀려와 모래 산이 되었는데 지극히 섬세하고 깨끗하다. 높이는 80척(尺) 정도 된다. 깎아 세운 듯 솟아 있는데 오르려고 해도 붙잡고 오를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얼핏 보면 성(城) 같기도 하고 흙 언덕 같기도 하고 섬돌 같기도 하고 이랑 같기도 하다. 혹은 움푹하다가 혹은 내리 뻗었다. 마치 허공에 매여 있는 듯하고 둥둥 떠 있는 듯하다.

바람에 날리고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며 옷자락을 때리고 신발에 가볍게 끌리며 물결에 쓸리고 풀잎에 긁힐 때면 번득번득 소록소록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다. 시험 삼아 다섯 손가락으로 모래 산 아래를 긁어보았다. 무너진 모래 산 아래를 메우기 위해 위에서 모래가 흘러 내렸다. 손가락 놀림에 따라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움직였다.

먼 위쪽 동그란 둔덕의 모래까지 흘러내리는데 그 기세가 마치 향연이 피어올라 허공에 떠 있을 때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모양 같다가 혹은 준마(駿馬)가 머리를 내두를 때 갈기털이 간들거리는 모양 같았다. 빗방울이 얇은 종이에 떨어지는 듯 부드럽게 젖어드는 듯하고 또한 만 마리 누에가 야금야금 먹어 뽕잎이 없어지는 듯하다.

조생과 박생이 기를 쓰고 모래 산에 올랐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올랐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대로 모래에 빠져서 마치 발목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봉의 모래가 마구 흘러내려 발자국을 이내 지워버렸다.

마침내 사봉의 정상에 올라 서쪽으로 대해(大海)를 바라보았다. 아득한 수평선에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타룡(鼉龍)이 뿜은 파도가 자욱하게 하늘과 맞닿았다. 한 마당 가운데 울타리를 치면 그 경계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이웃이라고 부른다.

지금 나와 조생‧박생 두 소년은 이쪽 모래 언덕에 서 있고 중국의 등주(登州)‧내주(萊州) 사람들은 저편 언덕에 서 있다. 이웃 사람처럼 서로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눌 만하다. 그러나 이쪽과 저편을 가로지르고 있는 바다가 넓고 깊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이웃 사람의 얼굴을 서로 알 수도 없다. 귀로 들을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고 발걸음이 닿을 수도 없는 곳이지만 오직 마음만은 달려갈 수 있다. 마음은 아무리 먼 곳이라고 해도 가지 못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이미 저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한 저편에서도 이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다는 하나의 울타리에 불과할 뿐이니 서로 보고 듣는다고 해도 안 될 것이 없다. 하지만 만약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 이쪽과 저편을 한눈에 볼 수 있다면 모두 한집안 사람들인데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는 이웃 사람이라고 생각할 까닭은 또 무엇인가!

높은 모래 산에 올라 먼바다를 바라보니 내가 더욱 작고 보잘것없이 느껴져 아득히 시름에 잠겼다가 문득 스스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저편 섬사람들이 가여워졌다. 가령 탄환 같은 작은 땅에 해마다 기근이 들고 파도가 하늘 높이 치솟아 흉년 때 나라에서 빌려주는 곡식조차 전달받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또한 바다 도적이 일어나서 순풍에 돛을 달고 쳐들어오면 도망칠 곳도 없어서 모두 도륙을 당하게 될 것이니 어떻게 할 것인가? 용과 고래와 악어와 이무기 등이 뭍에다 알을 낳고 억센 이빨과 독한 꼬리로 사람을 마치 감자를 삼키듯 먹어치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바다 신이 분노해 파도를 일으켜 마을을 남김없이 집어 삼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닷물이 멀리 밀려가 하루아침에 물이 말라버려 외로운 뿌리 높은 언덕만 앙상하게 그 바닥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파도가 섬 밑동을 갉아먹어버려 흙과 돌이 지탱하지 못하고 바다 물결을 따라 무너져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저런 걱정에 빠져있던 바로 그때 객(客)이 “섬사람은 끄떡없는데 오히려 그대가 먼저 위험하네. 바람이 불어 닥치니 장차 모래 산이 무너질 것 같네”라고 말하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모래 산을 내려왔다. 평평한 땅에 발이 닿자 슬슬 거닐며 돌아왔다.” (재번역)

황해도 장연의 금사를 가리켜 “왜 박지원이 한바탕 울 만한 곳이라고 했을까?”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풀기에 충분한 글이지 않은가. 아득한 수평선과 하늘과 맞닿아 있는 파도밖에 보이지 않는 풍경이야말로 요동벌판의 ‘하늘과 땅 사이에 탁 트여 끝없이 펼쳐진 경계’에 비견할 수 있는 ‘하늘과 바다 사이에 탁 트여 끝없이 펼쳐진 경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덕무의 시와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다시 이덕무의 『서해여언』의 우연한 마주침이 빚어낸 뜻밖의 결과다. 아무 의미가 없던 하나의 장면이 다른 장면과 만나고 다시 또 다른 장면과 우연히 겹치면서 뜻밖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 문학에서는 그것을 ‘우연성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대상 혹은 시적 존재를 마주하는 찰나의 순간 포착되는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을 한 마디의 시어 혹은 한 구절의 시구에 담는 것이 ‘촌철살인의 미학’이라면 하나의 대상과 풍경이 다른 혹은 여러 시적 대상과 풍경과 우연하게 겹치면서 뜻밖의 시적 착상과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연성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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