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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도 기억도 없는 도성 활터의 흔적들…웃대 오터·아랫대 네터(下)[활터 가는 길]⑧ 좌청룡 우백호 도열…암벽글씨로만 일부 남아
한정곤 기자  |  jkhan@iheadlin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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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24  08: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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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1751년. 국보 제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후 육상궁(毓祥宮) 뒤편 북악산 줄기의 산등선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이 담겼다.

[활터 가는 길]⑧ 좌청룡 우백호 도열…암벽글씨로만 일부 남아

한양 도성의 좌청룡 낙산을 내려와 주산인 북악산을 넘자 우백호 인왕산에 다다른다. 윤기(尹愭)의 시에서 ‘성곽의 흰 문’으로 표현된 창의문(彰義問)에서 서쪽 방향으로 ‘붉은 전각’, 즉 활터가 있었을 인왕산을 바라본다. ‘초록 넝쿨 사이에 붉게 단장한 여인’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꽃나무가 많아 상춘객이 몰렸던 세심대(洗心臺) 인근이다.

세심대는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국립서울맹학교(종로구 필운대로 97) 뒷산 중턱으로 확인되는 기록이 『정조실록』을 통해 전해져 온다.

“육상궁을 참배하고 봉안각을 봉심(奉審)하였으며 선희궁·연호궁·의소묘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장보각을 살펴보았다. 상이 근신들과 함께 세심대에 올라 잠시 쉬면서 술과 음식을 내렸다. 상이 오언근체시(五言近體詩) 한 수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짓도록 하였다. 이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임오년(영조38년·1762년)에 사당을 지을 땅을 결정할 때 처음에는 이 누각 아래로 하려고 의논하였으나 그때 권흉(權凶)이 그 땅이 좋을 것을 꺼려서 동쪽 기슭에 옮겨지었으니 지금의 경모궁(景慕宮)이 그것이다. 그러나 궁터가 좋기로는 도리어 이곳보다 나으니 하늘이 하신 일이다. 내가 선희궁을 배알할 때마다 늘 이 누대에 오르는데, 이는 아버지를 여윈 나의 애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다’ 하였다. 누대는 선희궁 복쪽 동산 100여보 가량 되는 곳에 있다” <『정조실록』 15년(1791년) 3월17일>

“육상궁(毓祥宮)·연호(延祜宮)·선희궁(宣禧宮)을 참배하고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시신(侍臣)들에게 밥을 내려주고 여러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였다. 선희궁의 소원(小園)에 도로 와서 화전(花煎) 놀이를 하면서 상(上)이 친언절구(七言絶句)로 시를 짓고는 군신들에게 화답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정조실록』 18년(1794년) 3월13일>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暎嬪)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에서 100여보 위쪽에 세심대 누대(樓臺)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다만 영조46년(1770년) 즈음 제작된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에는 선희궁의 서쪽에, 19세기 중기에 제작된 ‘수선총도(首善總圖)’에는 선희궁의 북쪽에 세심대가 표기돼 있어 정확한 위치 확인은 쉽지 않다.

윤기(尹愭)의 시에 ‘붉은 전각’으로 묘사된 활터는 세심대 바로 아래 있었다는, 『조선의 궁술』에 기록된 활터 가운데 인왕산 아래 옥인동에 있었다는 등룡정(登龍亭)을 가리킨다.

등룡정은 풍소정(風嘯亭)·등과정(登科亭)·운룡정(雲龍亭)·대송정(大松亭)과 함께 웃대 오터로 불렸던 활터다. 그러나 『조선의 궁술』 이외의 어느 문헌에서도 관련 기록은 찾을 수 없다.

   
▲ 종로구 옥인3길 끝지점의 ‘백호정’ 각자바위. <사진=한정곤 기자>

◇ 병든 백호가 원기 되찾은 약수터
웃대 오터의 수사정(首射亭)은 백호정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건립한 오운정(五雲亭)에서 갈라져 나온 최초의 민간사정으로 인조 재위 당시였던 1623~1649년 즈음 창정(創亭)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확인 가능한 기록은 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비록 정자는 사라졌지만 옥인3길(종로구 누상동 27-12) 끝지점에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황학정 최문구·황병춘·추교선 접장이 합류해 잔치국수와 막걸리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거나하게 취한 발걸음으로 백호정 터로 향했다. 배화여자중학교 정문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인왕산 턱밑까지 다다르자 우뚝 솟은 바위 윗부분에 새겨진 흐릿한 각자(刻字)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지도만 보고 가장 가까운 길을 택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만 철망과 낭떠러지에 길이 막힌 것이다. 개구멍(?)이 있나 두리번거렸지만 허사였고 결국 오던 길을 되돌아가다 발견한 쪽문 역시 겨울방학 기간 동안 자물쇠가 지키고 있었다.

담치기로 시간을 줄여 찾아간 백호정 각자바위는 지면에서부터 10여 미터쯤 위쪽으로 마치 퍼즐 조각 하나가 공중에 떠있듯 놓여 있었다. 옆으로는 인왕산 정상이 흰머리를 드러내고 아래로는 오래전 인왕산에서 흐른 약수를 길렀을 샘이 마른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이곳이 약수터였음을 알려주었다. 일반인들에게 활터보다 약수터로 더 알려져 있는 이유다.

인왕산에 호랑이가 많던 시절 병든 백호 한 마리가 풀속에서 물을 마신 후 원기를 되찾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약수다. 이후 백호정 약수를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졌고, 특히 전국의 폐질환 환자들이 이곳 바위틈의 작은 샘물을 찾아 몰렸던 유명한 곳이다. 백호정이라는 이름도 이 같은 전설에서 유래됐단다.

   
▲ ‘백호정’ 각자바위 아래의 약수터. <사진=한정곤 기자>

서울시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에는 숙종 때의 명필가였던 엄한명(嚴漢明)이 바위글씨를 쓴 주인공으로 기록돼 있다.

1685년(숙종11년) 태어나 1759년(영조35년) 사망한 그는 영월(寧越)이 본관으로, 자(字)가 도경(道卿)이고 호(號)는 만향재(晩香齋)다.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다른 사람 글씨를 모방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우선 가는 선으로 글자 윤곽을 그린 후 그 사이에 먹칠을 하고 본뜨는 서법(書法)인 쌍구확전(雙鉤廓塡)에 능했다. 당시 대부분의 묘갈(墓碣)은 그가 썼기 때문에 석봉(石峯) 한호(韓濩) 이후의 일인자로 일컬어졌다. 저서로는 『만향재시초(晩香齋詩鈔)』가 있다.

그런데 엄한명(嚴漢明)은 엄한붕(嚴漢朋)의 오기(誤記)라는 논란이 정리되지 않은 채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서울의 누정』에서는 서울시 안내판과 같이 엄한명이라 적고 있다. 반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는 엄한붕으로 기록하면서도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한국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에는 엄한명으로 나온다고 수정내역을 별도로 표기했다. 실제 두 사람의 생몰 연대가 같다는 점에서 동일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 백호정과 풍소정은 같은 활터?
백호정에서의 활쏘기 기록은 당시 신문보도를 통해 상당수 확인된다. 특히 1908년 신문에는 백호정에서 활쏘기를 했다는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황성신문』 1908년 5월27일 2면에는 ‘백호연회’라는 제목으로 “25일 영선군 이준용과 궁대 이윤용 등이 북서 백호정에 모여 궁사와 기악(妓樂)으로 성유(盛遊)했다”면서 “그날 의친왕 전하도 동참했다”고 전했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29일자 3면에는 ‘화전사과(花前謝過)’라는 제목으로 “영선군 이준용과 중추원 고문 이지용, 기타 황족 4명이 며칠 전 백호정에서 편사하다가 저녁식사를 이준용이 다동 소재 별실에 위탁해 찬품을 준비하라 했는데 저녁시간이 되어도 준비되지 않아 이준용이 크게 화를 내 일장공갈했더니 후회하고 밤늦게까지 사과했다”는 내용도 있다.

   
▲ 백호정 편사 도중 저녁식사가 늦었다고 이준용이 화를 냈다고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29일자 3면.

특히 백호정은 1930년대 후반 발행된 신문에서도 등장한다. 『매일신보』는 1921년 7월25일자 3면에서 ‘연합편사대회(聯合便射大會)라는 제목으로 “한강말굽다리 근처에서 25일부터 26일까지 양일간 백호정·황학정(黃鶴亭)·청룡정(靑龍亭)·한강사정(漢江射亭) 4곳 사정에서 계획해 오던 편사대회를 개최해 80여명이 한강말굽다리 부근에서 편사를 한다”면서 “지는 편에서는 1000원을 내기로 하고 각 권번 기생 50여명이 응원으로 나간다”고 보도했다.

또한 1920년 5월12일자 『동아일보』 3면에서는 “전날 11시경 백호정 정자가 무너져 그 안에서 낮잠을 자던 한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과 1939년 1월4일자 10면에도 “상촌의 다섯 사정이 회동해 초중회를 백호정에서 열었다”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

백호정 정자가 사라지고 바위글씨로 그 터만 남겨진 시기는 채 80년도 안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호정 옆에는 순조7년(1807년) 풍소정(風嘯亭)이 창건됐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언제 없어졌는지는 기록이 없다. 일부에서는 백호정과 풍소정이 같은 사정(射亭)이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황성신문』 1909년 4월4일자에는 ‘통신원유락(通信員遊樂)’이라는 제목으로 “3일 오전 12시에 통신관리국 사무원 일동이 풍소정에서 모여 놀았다”는 단신이 실려 있어 풍소정은 실제 존재했던 활터로 판단할 수 있다.

황학정 제5대 사두(射頭)였던 성문영(成文永)도 “옛날 인왕산 아래에 백호정(白虎亭)이 있었는데 순조 7년에 한붕(漢鵬)이 그 곁에 풍소정을 세웠다고 한다”는 기록을 현존하는 ‘황학정기(黃鶴亭記)’에 남겼다. 다만 기존 백호정 사원들과의 불화로 인한 분가인지 혹은 비좁은 백호정의 보완 차원에서 또 다른 활터를 옆에 세웠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 통신관리국 사무원 일동이 풍소정에 모여 놀았다는 내용의 『황성신문』 1909년 4월4일자 신문.

떨칠 수 없는 한 가지 의문이라면 ‘황학정기’가 작성됐던 1928년에는 앞서 살펴본 각종 신문기사들을 통해 백호정의 실존이 확인되고 있지만 성문영 사두는 “옛날 인왕산 아래에 백호정(白虎亭)이 있었는데”라며 과거형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듬해인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에서도 아랫대 수사정이었던 석호정이 아랫대 네터에 포함된 것과는 달리 백호정은 웃대 오터에서 빠져 있다. 오히려 그 자리를 풍소정이 대신하고 있다. 백호정이 사라진 이후 백호정에 뿌리를 두고 있는 풍소정을 일반인들은 백호정과 동일시하며 혼용(混用)해 불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대목이다.

◇ 김홍도의 그림 속 활터가 등과정?
백호정을 뒤로 하고 감투바위를 넘어 가는데 잇단 오르막 계단이 깔딱고개를 넘듯 숨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백호정에서 감투바위만 넘으면 황학정으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막걸리 기운이 얼큰하게 오르면서 네 사람 모두 발걸음이 더뎌졌다.

감투바위는 인왕산 중턱에 위치한 바위로 그 모양이 마치 벼슬하던 사람들이 쓰던 감투와 비슷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택견꾼들의 수련터이기도 하다. 2005년 10월 감투바위 수련터가 복원돼 택견꾼들이 자주 찾아 명소로 바뀌고 있다.

특히 감투바위는 황학정 정자(亭子) 뒤편의 약수터 바위에 새겨진 황학정팔경(黃鶴亭八景), 즉 황학정에서 느낄 수 있는 인왕산 주변의 8가지 경치 중 제3경 감투바위에 석양빛이 드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모암석조(帽巖夕照)’에 해당한다.

   
▲ 인왕산에 오르는 길가의 등과정 각자바위. <사진=한정곤 기자>

감투바위 동쪽으로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황학정 전경이 그대로 담긴다. 끊어진 황학정 한천각(閑泉閣)으로 내려가는 길을 뚫고 등과정(登科亭) 바위글씨로 향했다.

황학정 정자(亭子)와 사우회관 사이의 계단을 따라 오르면 인왕산길이 나오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해서체로 ‘登科亭’이라 새긴 바위를 찾을 수 있다. ‘등과(登科)’는 과거 급제를 뜻하는 말로 무과시험을 준비하는 활터라는 의미가 쉽게 다가온다.

바위 왼쪽 밑으로는 ‘광서양팔(光緖兩八)’이라는 각자도 발견된다. 양팔(兩八)이란 숫자 ‘88’이라는 뜻으로, 이는 청나라 광서제 16년(1890년) 또는 광서제 8년(1882년) 8월 새긴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등과정도 갑오경장 이후 폐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정확한 연대는 확대되지 않는다. 현재 등과정 자리에는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있던 황학정이 1922년 옮겨와 둥지를 틀고 있다.

일부에서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그림 ‘북일영도(北一營圖)’에 등장하는 활터가 훈련도감에서 설치한 군영 중 인왕산 끝 경희궁 북쪽에 위치한 아담한 군영이라는 점에서 등과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개연성은 낮다. 군영이라면 관설사정(官設射亭)이어야 하는데 등과정은 민간사정(民間射亭)이다.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북일영도(北一營圖)’. 고려대박물관 소장. 그림 속 활터가 등과정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개연성은 낮다.

아랫대 네터 중 낙산 줄기에 있었다는 화룡정(華龍亭)의 흔적이 없듯이 웃대 오터에서는 사직동에 있었다는 대송정(大松亭)에 대한 기록과 흔적이 없다. 또한 석호정이 좌청룡 낙산을 비켜나 남산에 있듯이 웃대 오터의 마지막 활터인 운룡정(雲龍亭)도 우백호 인왕산을 떠나 주산인 북악산 아래에서 발견된다.

◇ 정시·알성시 무과시험 개최된 민간 활터
운룡정은 종로구 삼청동 삼청공원 안에 있던 정자로 알려지고 있다. 정자를 세웠던 바위에는 ‘운룡정’이라고 각자도 새겨 넣었다고 하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지지는 않는다. 『서울의 누정』에서는 “삼청동 개인주택 마당에 있는 바위에 ‘운룡대(雲龍臺)’라고 쓴 해서체의 암각글씨가 있다”면서 “그 아래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운룡정이 있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삼청동 국무총리공관을 지나 북악산 산기슭에 이르자 삼청공원으로 가는 오른쪽 포장도로와 함께 왼쪽에는 주택 사이로 난 골목길이 있다.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실개천을 가로질러 다리가 놓여있고 그 아래로 조그만 우물이 시야에 잡힌다. 정조의 수라상에 진상했다는 운룡천(雲龍泉)이다. 우물 옆 벽에는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지만 세월에 깎여 희미하다.

좀 더 올라 칠보사를 지나치면 왼쪽으로 더 좁은 오르막 골목길이 나오고, 이어 삼청동 산2-53번지 개인주택 마당 동쪽 벽에 맞닿아 있는 바위 밑부분에서 해서체로 음각된 ‘雲龍臺’라는 글씨를 발견할 수 있다.

   
▲ 삼청동 개인주택 마당 동쪽 바위의 ‘운룡대’ 각자. <사진=한정곤 기자>

그러나 번지수를 알고 찾아갔고 바위도 이미 발견했지만 각자가 보이지 않아 거의 1시간여 동안 주변 골목을 헤매야 했다. 골목길에서는 육안으로 확인이 되지 않을 만큼 각자가 깊지 않고 더구나 담장 위에 조성해 놓은 나뭇가지가 글씨를 가리고 있었다. 대문에는 초인종이 없고 문을 두드려도 대답하는 이 없었다.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았지만 사진촬영을 위해서는 또 담치기를 할 수밖에.

운룡정은 민간사정이었지만 고종 때에는 정시무과와 알성시 무과시험이 개최된 활터이기도 하다.

고종 25년 무자(1888년) 3월13일 『승정원 일기』에는 고종이 “송병서에게 전교하기를 ‘이달 17일 관학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는 방외유생(方外儒生)까지 함께 실시하되 시험지는 대호지(大好紙)를 쓰고 경무대(景武臺)에서 친림(親臨)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시위한 무사, 배위(陪衛)한 무사, 입직한 무사도 기예를 시험보이도록 하라. 시관(試官)은 병조판서, 각 영사(營使), 입직한 각신과 옥당, 병조 낭청이 맡도록 하고 중일각(中日閣), 운룡정(雲龍亭), 흥무정(興武亭), 북일영(北一營)으로 시소(試所)를 나누어 시취하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종 26년 기축(1889년) 2월1일 『승정원 일기』에도 “민치헌에게 전교하기를 ‘이달 6일 관학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는 방외유생(方外儒生)까지 함께 실시하되 시험지는 대호지(大好紙)를 쓰고 경무대(景武臺)에서 친림(親臨)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시관(試官)은 시원임빈객(時原任賓客)과 춘방(春坊) 중에서 의망(擬望)해 들이라. 무과(武科) 응시자도 기예를 시험해야 할 것이니 시관은 통위사(統衛使), 총어사(摠禦使), 입직한 각신(閣臣)과 옥당(玉堂)이 하되 중일각(中日閣)과 운룡정(雲龍亭)으로 시소(試所)를 나누어 시취하라’ 하였다”고 기록했다.

고종 26년 기축(1889년) 12월2일 『승정원 일기』에는 알성시 무과를 8일 운룡정에서 명관으로 거행하라는 전교도 민계호에게 내려진다.

“알성시(謁聖試) 무과(武科)는 이미 초시(初試)를 생략하였으므로 당일에 거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8일에 먼저 운룡정(雲龍亭)에서 시장(試場)을 열되 명관(命官)으로 하여 행하라.”

   
▲ 운룡정에서 연회가 열렸다는 『독립신문』 1899년 8월8일자 기사.

◇ 활쏘기보다 고관대작들의 모임·연회장 활용

운용정에 대한 기록은 1909년 8월까지 확인된다. 다만 활쏘기보다는 고관대작들의 각종 모임과 연회장소로 자주 거론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수려했을 주변 경치가 머릿속으로나마 그려진다.

“지난 일요일 경무청 국장 이하 경무관리들이 모두 삼청동 운룡정에 가서 노리를 하는데 음식 등절과 위의 범백이 대단 성비하고 찬란하며 노래꾼은 십여세 된 아이가 세 명이고 어른이 세 명이라 흥취 있게들 노는데 구경군이 구름 같이 모였더라고들 하더라. <『독립신문』 1899년 8월8일자>

“近衛隊尉官以下兵丁(근위대 위관 이하 병정) 百餘名(백여명)이 再昨日(재작일)에 三淸洞雲龍亭(삼청동 운룡정)에 會同(회동)하야 濯足會(탁족회)를 盛設(성설)하얏다더라.” 『황성신문』 1909년 8월21일>

운룡대 바위글씨에서 아래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운룡정의 현재 위치는 마을버스 종점인 군부대 자리다.

   
▲ 운룡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운룡대 각자바위 아래쪽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웃대 오터와 아랫대 네터의 마지막 여정인 삼청동 운룡정의 흔적을 뒤로 하고 경복궁까지 걸어 내려오면서 무엇인가 놓고 온 듯한 허전함을 털어내지 못했다. 누가 말했던가.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부정확한 기억의 산물”이라고.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는 진리가 뒷목을 잡아당겼다.

생텍쥐페리는 그의 소설 『인간의 대지』에서 “집이 경이로운 것은 우리 마음속에 그 아늑한 물건들이 천천히 쌓여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 어렴풋한 덩어리를 만든다”고 말했다.

천천히 쌓여온 아늑한 물건을 찾아갈 옛집도 사라졌고 어렴풋한 덩어리를 만들 그 무엇마저 없는 회한은 오늘날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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