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기슭 곰나루터의 현대식 전통활터 건물의 시초”…공주 관풍정(觀風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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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기슭 곰나루터의 현대식 전통활터 건물의 시초”…공주 관풍정(觀風亭)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9.05.24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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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⑩ ‘관풍정기’ 전문 첫 번역 공개…이건기 아닌 창건기
▲ 1955년 5월 관풍정에서 습사하고 있는 사원들. 관풍정의 옛 사정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제공=공주학연구원>

[활터 가는 길]⑩ ‘관풍정기’ 전문 첫 번역 공개…이건기 아닌 창건기

충남 공주로 길을 잡은 5월 중순은 황토현과 금남로의 중간쯤이었다. 86년의 시차를 두고 봄볕 내리는 5월11일과 18일 흰옷 입은 숱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그리고 6개월 뒤 우금치와 10일 뒤 전남도청에서 그들의 시간이 멈춰버린 햇살 맑은 그 가운데 날이었다.

녹두꽃 떨어지고 목련꽃 지는 것을 슬퍼할 만큼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그보다 더 희고 고운 혼들이 스러진 그날의 노여움은 찬란한 슬픔마저 빼앗았다. 더러 잊혀지고 잊혀지길 바라는 이들에 의해 정치적 수식어로 각색되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역사의 평가에 감히 정치가 개입할 여지나 있겠는가. 모두의 슬픔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치적이라는 그들의 왜곡 자체가 더 정치적일 뿐이다.

남녘으로 가는 5월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에 슬픔과 노여움이 함께 하는 이유다. 어느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아우성이 문병란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저 미치게 푸른 하늘’에 가득하다.

어쩌면 동학(東學)과 광주는 출발부터 맺음까지 그리도 닮은꼴인가.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팀이 발견해 공개한 미국 국방정보국(DIA) 1980년 5월21일자 문서에 광주시민을 향해 “발포를 허가받았다”며 “동학혁명과 비슷한 상황이다”는 첩보문구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억지스러운 연결은 아니리라.

◇ 동학농민군이 넘지 못한 우금치 고개 너머의 공주
공주 땅에 들어서며 “그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를 /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그땐 / 그 오포(午砲) 부는 하늘 아래 더러 살고 있었단다”고 읊었던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 『금강』을 길잡이 삼아 찾은 우금치에는 황량함이 먼저 마중을 나온다.

▲ 국도 40번 우금티터널 가에 건립된 동학혁명위령탑. <사진=한정곤 기자>

공주의 남쪽 관문인 우금치는 전봉준의 동학군이 전주에서 호서지방의 요충지이자 충청도 감영 소재지였던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했던 견준산 기슭의 고개로 동학농민혁명의 최대·최후의 격전지다. 그해 겨울로 들어서는 11월 3만여명의 동학군이 일주일 밤낮으로 계속됐던 전투에서 불과 1000여명만 살아남는 대참패로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한 채 보국안민(輔國安民)·제폭구민(除暴救民)·척왜척양(斥倭斥洋)의 꿈을 접어야 했던 한이 서린 곳이다.

지금은 우금티터널이 뚫린 40번 국도변에 그 통곡소리를 담은 ‘동학혁명위령탑’이 1973년 11월 천도교 공구교구에 의해 세워져 쓸쓸하게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또한 전적지인 우금치 고갯마루는 10여개의 목장승들이 지키고 있다.

위령탑은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한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못다 이룬 꿈을 꾸고 있다. 옆 도로가에는 올해부터 매년 5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제정한 것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흔들리며 매달려 있다.

가슴 속 헛헛한 그 무언가를 남기고 동학농민군이 넘지 못했던 우금치고개를, 그 아래 우금티터널로 통과해 공주시내로 들어선다. 미세먼지인지 아니면 송홧가루인지 분간할 수 없는 뿌연 흩날림에도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하얀 아카시아 꽃들이 진한 향기를 내뿜는다.

▲ 동학농민군이 결국 넘지 못한 우금치고개. <사진=한정곤 기자>

관풍정(觀風亭)까지는 직선거리로 불과 4km 남짓. 무령왕릉을 비롯한 송산리고분군을 지나 금강변 곰나루교차로 못미처 한옥마을을 끼고 두 차례 우회전으로 관풍정을 만난다. 주차장으로 진입하려다 구불구불 산길의 유혹에 그대로 직진해 버린다. 하마터면 관풍정 사대에서 왼쪽으로 담장을 끼고 조성된 오르막산길에서 관풍정을 한눈에 담는 호사를 놓칠 뻔 했다.

무겁 뒤편으로 솟은 언덕에 오르면 사대까지 길게 누운 관풍정과 멀리 연미산·채죽산 봉우리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한옥마을 지붕들이 정겨움을 더해주고 언덕에 가린 공주국립박물관은 백제의 고도(古都)에 와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멀리 사대에서 차례로 살을 보내고 있는 4명의 궁사까지 그림 속에 끼워 넣으면 더할 나위 없이 한가로운 산수화 그 자체다.

◇ 내분 없어 분리(分亭)되지 않은 공주 유일 활터
홀로 연전(揀箭)길을 다녀온 김용범 접장이 낯선 외지인의 방문을 반갑게 맞아준다. 오전부터 6순을 내리 보냈다는 김 접장은 다가오는 입단시험을 준비하는 신사(新射)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30여분 뒤에는 가야 한다면서 서두르는 김 접장을 따라 준비운동도 못한 채 사대에 오른다.

▲ 무겁 뒤 언덕에서 내려다 본 관풍정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사대에서부터 양 옆으로 좌청룡 우백호인 양 전통양식의 담장이 줄지어 늘어선 무겁까지는 풍기가 무색하리만치 바람이 없다. 야산을 향해 움푹 들어앉은 듯한 활터는 평지의 직선으로 곧게 뻗어 편안함까지 준다. 남동 방향을 향하고 있는 사대에 오전 10시까지는 아침햇살이 눈을 부시게 한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선관지형 후찰풍세(先觀地形 後察風勢: 먼저 지형을 관찰하고 후에 바람의 세기를 살핀다)가 굳이 필요 없다. 그래도 과녁을 빗나가는 살은 어쩌란 말인가.

관풍정은 1991년 7월 준공한 과녁 4개의 현대식 활터다.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2층은 전통 한옥 양식의 우진각 지붕을 얹었고 1층 지붕에도 기와를 둘렀다. 대지 면적만 7590㎡에 건물 면적은 488.35㎡ 규모로 지하 1층에는 기계실이 들어섰고 지상 1층엔 역대 사두들의 사진이 가지런히 걸린 사무실을 비롯해 휴게실·궁방 등을 갖췄다. 지상 2층은 원래 충남궁도협회 사무실이었지만 지금은 휴게실로 사용되고 있다.

1977년 관풍정에서 집궁(執弓)했다는 이의형 사범은 “현대식 활터 건물의 시초”라고 자랑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신축 활터 건물에 전통한옥양식을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없었던, 서양식 건물구조가 대부분이었지만 관풍정은 전통건축양식과 현대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설계로 준공 이후 전국 활터에서 도면 요청이 이어졌다는 설명이 따라온다.

특히 금강 기슭의 나루터인 곰나루 인근의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에 관풍정이 들어선 이후 1992년 선화당을 시작으로 포정사(1993년)와 동헌(1994년) 등 충청감영이 복원되고 2010년 한옥마을까지 조성되면서 관풍정은 주변 환경과 가장 잘 어울리는 전통활터의 면모도 갖추었다.

▲ 관풍정 1층 사무실에 걸려 있는 역대 사두들의 사진. <사진=한정곤 기자>

관풍정 유정명 총무이사에 따르면 현재 등록된 사원은 여무사 6명을 포함해 83명이다. 연령층은 26세 여무사에서부터 80대까지 다양하다. 매년 입사하는 신사는 평균 4~5명 정도로 지인의 권유가 대부분이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엔 스스로 국궁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입사비는 지방에서는 다소 높은 수준인 50만원이며 월 회비는 남자 2만5000원, 여자 1만5000원으로 차등을 두고 있다.

사원들은 관풍정이 공주 유일의 활터로 내분이 없어 타 도시와 달리 분정(分亭)되지 않은 단일 활터라는 데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격년으로 백제문화제 기간 전국대회를 주관하고 있으며 올해는 9월 말로 예정돼 있다.

◇ 옛 사정 보존…“궁시 수집·전시 계획”
관풍정 사대 왼쪽으로는 아담한 한옥건물이 고즈넉하게 서 있다. 1936년 건립한 옛 사정이다. 현재의 자리로 활터를 이전하면서 과거 공산산성 남쪽에 있던 옛 사정 건물을 그대로 옮겨왔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전통한옥이지만 창호가 유리창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유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유정명 총무이사는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지만 향후 박물관으로 활용할 계획을 갖고 있다”면서 “예전 사원들이 사용했던 각종 장비들을 수집해 전시하려 한다”고 말한다. 현재 내부 마루 한쪽에는 이의형 사범이 수집하고 기증받은 각궁과 목궁 등 각종 활과 제작사별 개량궁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촉이 달린 화살, 전통(箭筒), 화피, 소 힘줄 등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보다 300여년이 앞선 1635년에는 공산성 쌍수정(雙樹亭) 뒤쪽에 관풍정 첫 사정이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기록이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공주 지역의 기록 수집과 콘텐츠를 개발하고 기록물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을 찾아 관풍정 관련 논문을 비롯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구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자료실 책임연구원인 고순영 박사는 “공주학연구원에서 수집·보관하고 있는 관풍정 관련 자료는 사진과 사원명단을 비롯해 총 14건”이라면서 “관풍정의 역사를 연구하거나 공주지역의 활쏘기 역사를 기록한 자료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들 14건의 자료도 모두 1955년 이후 촬영되거나 기록된 문서들이다.

▲ 사대 왼쪽에 보존된 옛 사정. <사진=한정곤 기자>

“우리 고을은 충청도에서 가장 큰 부(府)로서 정자의 아름다움 역시 나라 안에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갑자년(1624년·인조2년) 이괄의 난 때 우리 인조대왕이 쌍수성에서 주필(駐蹕)하시다 난리가 평정된 후 환궁하셨으니 중하게 여긴 바가 마땅히 어떠하였겠는가.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예부터 사정(射亭)이 하나도 없어서 선비를 양성하는 데 다행스럽지 못했다. 을해년(1635) 봄부터 관리와 유생이 이 정자를 건립하기로 발의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쌍수성 뒷기슭에 건립하게 되었다. 동쪽으로는 금강이 성곽을 감싸며 길게 흐르고, 남쪽으로는 월성(月城)이 새벽달을 비추고 있고, 서쪽으로는 봉황이 성인의 출현을 기다리며 고개를 들고 있고, 북쪽으로는 높이 동혈사(東穴寺)가 금은을 감추어서 도움을 주었다. 이에 만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져 다사(多士)가 빈빈(彬彬)하게 동궁(彤弓)을 잡아당겨 활을 쏘니 다섯 발 중 네댓 발이 과녁을 맞혔다. 낙성을 축하하여 빈객을 청하니 동서남북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며 편액을 관풍(觀風)이라 하였다.”

관풍정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 내용으로 출처를 ‘관풍정기(觀風亭記)에서’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 밑에는 ‘을해년(1635년) 산성공원 쌍수정 뒤쪽에 건립, 병자년(1936년) 산성공원 남쪽에 이전, 신미년(1991년) 현 공주시 웅진동으로 이전’이라고 연혁을 적었다.

그러나 관풍정 사대 옆 옛 사정에 보관돼 있는 ‘관풍정기(觀風亭記)’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다. 현재 관풍정 안에는 ‘관풍정기(觀風亭記)’ 4개와 각각 ‘서(序)’·‘운(韻)’이라는 제목이 달린 총 6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 안내문과 내용 다른 옛 사정 보관 4개의 ‘관풍정기’
관풍정에는 이들 편액의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원이 없단다. 당연히 번역본도 없다. 황학정 장동열 사범과 한문학자 한임(翰軠) 선생의 도움을 받아 이들 편액의 한자를 옮겨 적고 번역했다.

정기(亭記)는 일반적으로 건축물의 역사를 기록한다. 없던 정자를 새로 만들면 창건기(創建記), 원래 있던 정자를 허물고 장소를 옮겨 새로 지으면 이건기(移建記), 낡은 부분을 손질해 고치면 중수기(重修記)·중건기(重建記), 낡은 건물을 고쳐 있던 자리에 다시 새롭게 지으면 중창기(重創記)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따라서 관풍정에 보관된 4개의 ‘관풍정기’는 이건기(移建記)로 구분돼야 한다.

▲ 율당 서덕순이 쓴 ‘관풍정기’. <사진=한정곤 기자>

昔孔子重六藝使其弟子而習之射 非爲中鵠之巧取其正己觀德之意 至於音樂亦所以養性情之理也而 吾儕之揖遜歌詠於此者良有以也 嗟我同志感慕先賢之遺風欲設講 藝之所衆議一叫互相捐財翼然一 亭不日成之鳳山之北錦江之南扁 其額曰觀風亭也觀風之義不是吟 風弄月取以觀先聖之遺義而然也 况諸公俱以尙文尙武之後裔遭此 自力之世能有奮勵之志桓桓其人 赳赳餘風習成古禮此亭之起也以 開後進之路永年存繼此亭之壽也 正己而觀德君子之修身循序而歌 詠從容之中道矣由基之高手自在 呂氏之熟藝何難伯牙之善彈楚人 之名調奚獨專美於古耶禮典之俱 合軆育之發揮豈可比於俗流放浪 也哉同志諸益射於斯樂於斯禮俗 相交無相奪倫此眞一大盛擧也回 首環境 鳳峀朝霞 鸞尾落照 熊津漁笛 鶴洞樵歌 靈寺暮鍾 蒼壁丹楓 雙樹淸風 錦橋明月 皆爲此亭之美可謂人得其地地得 其亭亭得其名不亦宜乎因此而移 風昜俗天下皆知斯亭之美焉則幸 矣余固不文喜斯亭之成敢此數語 而記之爾 繼以韻曰 錦南第一有斯亭 到此何人不馬停 彬彬多士皆吟詠 赳赳武夫哉覺醒 簷端雲影英英白 檻外山光隱隱靑 習禮滄窮觀德立 一聲漁笛古江汀 丁丑三月上澣 栗堂 徐悳淳

옛날 공자께서 육예(六藝)를 중시하여 제자들에게 배우도록 하였다. (그 중 하나인) 활쏘기는 과녁을 맞히는 기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바르게 함이다. 관덕의 뜻은 음악에 이르러서도 또한 성정을 기르는 이치를 취한 것이다. 우리들이 여기서 겸손하고 시가를 읊는 것은 자못 이유가 있는 것이로다.

아! 우리 동지들이 선현께서 남기신 풍화(風化)에 감격하고 사모하여 기예를 익히는 장소를 세우려고 여러 사람이 의견을 하나로 합치고 서로 재물을 내놓아 날아갈 듯한 정자 하나를 얼마 걸리지 않아 봉산의 북쪽 금강의 남쪽에 만들고 편액하기를 관풍정이라 하였다.

관풍이라는 뜻은 음풍농월(吟風弄月)이 아니라 성현께서 남기신 것을 본다는 뜻을 취하였다. 게다가 여러분이 모두 글을 숭상하고 무예를 숭상하는 후예들로서 이 자력(自力)의 세상을 만나 기운을 내어 힘쓰는 의지를 갖고 사람됨이 씩씩하고 평소의 풍모가 헌걸차며 옛 예의(禮儀)를 배워 익히는 것은 이 정자의 일어남이며 후진의 길을 열어 영원히 계속됨은 이 정자의 수명이다.

자신을 바르게 하고 덕을 보는 것은 군자의 수신(修身)이며 순서를 밟아 시가를 읊는 것은 종용히 도에 알맞음이다. 유기(由基: 춘추시대 장군인 양유기(養由基)로 100보 밖에서 버들잎을 쏘아 명중시킬 정도의 명궁)의 뛰어남은 저절로 있을 것이며 여씨(呂氏: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포로 활솜씨가 뛰어난 장수로 유명)의 기예에 능숙함이 무슨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백아(伯牙: 거문고를 잘 탔던 사람으로 고사성어 백아절현(伯牙絶絃)의 주인공)의 뛰어난 연주와 초나라 사람의 유명한 곡조 같은 아름다움이 어찌 옛날에만 있을 것이겠는가. 예법(禮法)이 모두 합치되고 체육이 발휘됨이 어찌 세속의 속된 무리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님에 비할 수 있으리오. 동지들이 모두 여기서 더욱 활을 쏘고 즐기고 서로 사귐에 예의를 지키고 서로 조화를 잃지 않는다면 이것이 진실로 일대 쾌거일 것이다.

…(중략: 주변 경치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내용)…들은 모두 이 정자의 아름다움이니 사람이 땅을 얻고, 땅이 정자를 얻고, 정자가 이름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이로 인해 나쁜 풍속을 좋게 개선함이 이 정자의 아름다움임을 세상이 모두 알 것인 즉 다행이로다. 내가 글 솜씨가 없지만 이 정자가 세워진 것을 기뻐하여 감히 이 몇 마디 말로 기록하노라.

이어서 시를 쓰노라. 금강 남쪽에 제일 먼저 이 정자가 있으니 / 이곳에 이르러 누군들 말을 멈추지 않으리오 / 빛나는 많은 선비들이 모두 시를 읊고 / 무예인들이 씩씩하게 각성(覺醒)하도다 / 처마 끝 구름 그림자 뭉게뭉게 하얗고 / 난간 밖 산빛은 은은하게 푸르네 / 예를 익히고 조용히 탐구하여 관덕을 세우고 / 어부의 피리 소리는 옛 강가에서 들려오네. 정축년(1937년) 3월 상순 율당 서덕순

읽다보니 뭔가 허전함이 밀려온다. 쌍수정 뒷기슭에서 활터를 옮겨온 내용이 빠져 있다. 건축 당시 사원이었던 글쓴이의 벅찬 감회가 절절해 관풍정의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이가 읽는다면 자칫 창건을 자축하는 내용으로 착각하기에 충분하다. 다른 ‘관풍정기’ 편액의 내용도 보자.

▲ 만초 정한명이 쓴 ‘관풍정기’. <사진=한정곤 기자>

亭以觀風名者示其顧名思義 也惟吾諸益生幷一世居同一 省年相若而志亦同每以射樂 從事於間暇射與樂六藝中大 者也故經曰射可以觀德樂可 以觀風而先聖先賢莫不留心 於此昔我夫子之觀射也使子 路執弓矢而出爲觀其德而然 也延陵之聽樂也贇美而請止 爲觀上國之風而然也三代以 前上自朝廟下至閭巷莫不隆 盛三伐以後世級降襄名實俱 弛曷勝歎哉以若千載後學才 且蔑如豈敢昜言而昜學然正 己存心學而時習作之不已則 庶或有知其糟粕之萬一故詢 謀醵金建亭于城之南江山之 美繡錯於前市幷之繁棊布於 下可以供斯亭之風景而如在 畵圖中是時天氣和暢群賢畢 集射於斯樂於斯較其優劣評 其淸濁儀容之整齊節奏之典 雅雖不及於古可以勸於今乃 庸觀德觀風之義而名亭願我 同志顧名思義終始如一則何 患不到觀風觀德之境後之人 嗣而葺之庶幾斯亭之永保云 爾 繼以韻曰 共將射樂上高亭亭下行人孰 不停鍊習精工兼手熟洗淸邪 穢却心醒江流錦濯暎階白山 峙鳳來依笏靑弓矢暫休筩以 樂餘音遙亮滿空汀 歲在丁丑三月上澣 晩樵 鄭漢明

정자를 관풍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명(名: 이름·명예)을 돌아보고 의(義)를 생각함을 보는 것이다. 우리 여러 친구가 함께 한 세상에 태어나 같은 곳에 살고 나이도 서로 엇비슷한데 뜻도 같아서 매번 한가한 때에 활쏘기와 악(樂)으로 즐거움을 일삼는다. 활쏘기와 악(樂)은 육예(六藝) 가운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 이르기를 활쏘기로 덕을 볼 수 있고 악(樂)으로 풍속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옛 성현께서는 이에 마음을 두지 않으신 분이 없었으니 옛날 공자께서 활쏘기를 보심에 자로에게 활과 화살을 들고 나서게 한 것은 그 덕을 보고 그런 것이다. 연릉이 음악을 들음에 찬미하고 멈추기를 청한 것은 상국(여기서는 주나라를 뜻함)의 풍화(風化)를 보고 그런 것이다(공자와 자로 이야기는 『예기(禮記)』의 <사의(射義)> 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연릉 이야기는 오나라 계찰(季札)의 고사다).

삼대(중국의 하·은·주 나라) 이전에 위에서는 조정과 종묘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융성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삼대 이후에는 세대가 내려올수록 쇠약해져서 이름과 실상이 모두 해이해졌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으리오. 약 천년 후에 학문에 대한 재능도 없어졌으니 어찌 함부로 쉽게 말하고 쉽게 배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지키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며, 행하기를 쉬지 않으면 아마도 아주 조금의 술지게미(성인이 이미 다 밝혀 놓은 것)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묻고 비용을 추렴하여 성(城)의 남쪽에 정자를 세우니 아름다움을 수놓은 강산이 앞에 섞임과 도시의 번화함이 아래에 펼쳐짐이 가히 이 정자의 풍경을 제공하여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하다. 이때 날씨가 화창하고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모여 여기에서 활을 쏘고 음악을 하며 그 우열을 가리고 청탁(맑고 흐림)과 의용(儀容)의 가지런함과 절주(節奏)의 바르고 고상함을 평하니 비록 옛날에는 미치지 못하나 가히 지금은 권할 수 있다.

이에 관덕(觀德)과 관풍(觀風)의 뜻을 써서 정자의 이름을 짓는다. 원컨대 우리 동지들께서 명(名)을 돌아보고 의(義)를 생각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한다면 관풍과 관덕의 지경에 이르지 못할 것을 어찌 걱정하리오. 후인들께서 계속하여 지붕을 이어준다면 이 정자가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

이어서 시를 짓노라. 함께 활 쏘고 음악하려 높은 정자에 오르니 / 정자 아래 행인들이 누군들 멈추지 않으리오 / 연습하고 갈고 닦으니 손에 익숙하고 / 삿됨과 더러움을 씻어내니 마음이 깨네 / 강 흘러 비단처럼 씻어 계단이 희게 비추고 / 드높은 산에 봉황새 날아와 홀(笏)이 푸르네 / 활과 화살 잠시 멈추고 퉁소로 음악하니 / 여운이 멀리 퍼져 빈 물가를 가득 채우네. 정축년(1937년) 3월 상순 만초 정한명

앞의 편액과 큰 흐름에서 내용이 다르지 않다. 나머지 2개의 ‘관풍정기’에도 쌍수정 뒤쪽 기슭에 있었다는 최초의 사정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고 새로 신축하는 사정에 대한 기대와 감격이 전부다. ‘이건기(移建記)’보다는 오히려 ‘창건기(創建記)’에 더 어울리는 문장들이다.

▲ 지운 박준식이 쓴 ‘서(序)’·‘운(韻)’ 편액. <사진=한정곤 기자>

자료를 뒤지면 뒤질수록 최초의 관풍정에 대한 존재감은 더욱 멀어져만 간다. 1936년 7월11일자 동아일보에는 ‘관풍정 준공’이라는 제목으로 “쌍수산성 옥녀봉 밑에 굉장한 구식와가를 준공하고 오는 12일 오전 10시부터 다수의 내빈을 초대해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한다”는 기사가 게재돼 있다. 역시 창건 기사다.

앞서 소개한 ‘관풍정기’보다 1년 앞선 준공 당시인 1936년(소화 11년) 7월 지운(芝雲) 박준식(朴準植)이 쓴 ‘서(序)’·‘운(韻)’이라는 제목이 붙은 2개의 편액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우리 공주는 백제의 옛 도읍이며 호서의 명승지이다. 교육과 제도와 연역과 시설이 차례로 발전하였다. 다만 유감인 것은 바쁜 틈을 내어 체육을 할 수 있는 기관이었는데 뜻이 있는 여러 분께서 용감하게 기예를 닦을 수 있는 협회를 만들었으니 음악과 궁술이 그것이다. 노래 불러 곡조를 맞추고 쏘아서 맞추는 것이 어찌 아름답지 않다 하리오. 매번 간담(懇談)을 나눌 때 여러 가지 것을 지정하지 않음이 한이었는데 회원들이 각자 그 의리에 분발해서 작은 정자를 만들었다. 서쪽은 수봉산이고 북쪽은 금강을 띠고 있어 사계절이 아름다운 경치라서 글로 다 쓸 수 없다. 바쁜 틈을 내어 수양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勇進文明世 용맹정진하는 문명의 세상에
誰醒孰不醒 누가 깨어 있고 누가 않으랴
以若公山地 저 공산(公山)의 땅에
晩乎此一亭 늦었구나 이 정자가

◇ 구전에 근거한 새로 만든 현대식 ‘관풍정기’
그렇다면 1635년 인조의 하명으로 관풍정이 창건됐다는 안내판의 내용은 어느 ‘관풍정기’에서 나왔는가. ‘관풍정이전신축경기(觀風亭移轉新築經記)’라는 편액에 그 내용이 있다. 현대식 사정 건물이 준공된 1991년 초여름 제작된 새로운 ‘관풍정기’로 현재 1층 사무실에 걸려 있다.

▲ 1991년 신축사옥 준공 당시 제작된 ‘관풍정이전신축경기’ 편액. <사진=한정곤 기자>

관풍정 관계자는 “현대식 신축활터로 이전할 때 구사들이 관풍정의 역사를 다시 정리해 만든 관풍정기”라고 소개한다. 다만 그 근거에 대해서는 “구전(口傳)이라고 들었을 뿐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고 답한다.

옛 사정에 걸려 있는 또 다른 ‘관풍정기’에서 이 관계자가 말한 구전(口傳)의 실마리가 보인다.

古熊州府距前面一箭地有公字名山山 上城堞羅代所築云環東西北三面錦江 一帶水遙遙如彎弓其中巍然立鎭南拱 北兩城門有伏弩把關之險寔天設用武地 也據此形勝管五十州首省滿三千戶雄 府挽近寥寥未聞有一射喉者亦一欠典 公之人何若是其不武歎曰惡此曾百濟 文周王初來■■地也肆我憲文王甲子 南巡至此獻馘于行宮特設文武兩科於 雙樹亭立石頌功自後設置益壯嚴矧玆 嶺湖咽喉關防愼密前營後營控弦之士 如熊如虎轅門組練日以爲常至於鄕村 弋鴈逐鹿輩畵入彀中外此間局有何架 疊設帿哉余亦丁年■員迸手見將臺上 三申號令猿臂烏號■相磨■*邊中貫中 逞技衒能歷歷如嗝晨回顧五十年間風 雲變色所謂戰陣上二戈戚揚已屬芻狗 礟煙丸雨蒸蒸日上現代靑年手不知操 弓往時演武場鞠爲筏草鴻鵠張之孰能 彎弓一射哉八十爾爾懸弓有壁正如櫪 上老驥臥念百戰前塵自不禁一聲咆哮 迺與同志謨暮年銷受有甚佳趣彼風欄 月■騷人墨客撚鬚琢句無過是自鳴其 不平而已正當春江如練秋山如畵夕陽 前路臂弓腰箭千錢沽酒醉興滔滔正面 畵鵠連發五中滿場喝采豈不痛快哉咸 曰唯各自願捐醵起一亭于公山南麓翼 然煥乎宏濶壯麗乃擧落成式滿供祝辭 曰嘗觀名亭傑搆項背相望擧皆■詔其 子子傳其孫肯堂肯搆惟恐失自家所有 凡我此亭公諸一世使滿城人士有來千 百永令守護演藝觀德其樂也共司享有 陳述協會趣旨遂大書特字曰觀風亭客 有難之者曰今玆上棟下字取諸大將弧 矢以威天下取諸暌卦可謂該括無遺但 現今砲火轟天雖有穿楊神箭正如平城 之干戚越人之童甫不適於用何且亭額 觀風二字是刺史之事恐不着題何余曰 弓矢雖謂戰時所用本以正己而發可以 觀德者也故古聖人列於六藝之科目若 專以臨陳賈勇爲能事則孔子對衛靈公 曰軍旅之事吾未之學也何嘗有矍相圃 之射哉扁■許多般觀德其如遼東豕斯 不取若觀風者夫刺史宣上恩德觀民風 者也吾儕登斯亭將以觀三代上鄕射之 遺風也所觀各自不同庸何傷哉客唯唯 而退遂爲之記 柔兆困敦歲遯月上澣 七十九 ■ 南平 文在悳 記

▲ 1936년 남평 문재덕이 쓴 ‘관풍정기’. <사진=한정곤 기자>

옛 웅주부의 앞쪽으로 활을 쏘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 ‘공’이라는 이름난 산(공산)이 있는데 산 위의 성첩(城堞: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은 신라시대에 건축된 것이라고 한다. 동·서·북의 세 면을 두른 금강 한 줄기가 굽은 활처럼 멀리멀리 흘러가고 그 가운데에 진남(진남루)과 공북(공북루)의 두 성문이 높이 서 있는데 활을 가진 복병이 관문을 지키는 험준함이 있어 과연 하늘이 베풀어주신 군사용 땅이다. 이 뛰어난 지세에 의탁해 50주를 거느리는 으뜸 고을은 3000호가 가득 찬 웅장한 고을이다.

(그런데) 요즈음 활쏘기를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는 소리를 좀처럼 듣지 못하는 것 또한 하나의 흠이 되는 일이니 공주의 사람들이 어찌하여 이처럼 무예를 하지 않는가 탄식하여 말한다.

아, 이곳은 일찍이 백제의 문주왕이 처음 와서 도읍한 곳이다. 우리 헌문왕(인조)이 갑자년(1624년)에 남방을 순행하여(이괄의 난 때 피신해 온 것을 말함) 여기에 이르러 행궁(行宮)에서 헌괵(적의 수급(首級)을 임금에게 바치는 것)하고 특별히 쌍수정에서 문무(文武) 두 과거시험(갑자년 공주정시를 말함)을 베풀고 비석을 세워 공훈을 송축하였으며, 그 뒤부터 설치가 더욱 장엄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곳은 영남과 호남의 요충지이자 국경 수비지로서 앞의 병영과 뒤의 병영으로 빈틈이 없고, 활을 당기는 병사가 곰과 호랑이 같이 용맹하고 헌문(군영(軍營)을 뜻함) 군대의 모습이 날이 갈수록 매일 당연한 일로 되어갔으며, 향촌에 이르러서는 기러기를 쏘고 사슴을 쫓는 무리는 모두 원하는 대로 잡았다. 이런 한가로운 때 말고는 어찌 과녁을 거듭하여 설치할 수 있었겠는가.

나 또한 젊었을 때 선수생활을 하면서 장대(將臺)에서 세 번 호령을 하면 활쏘기에 뛰어난 이들이 오호(烏號: 좋은 활을 뜻함)를 서로 당겨 과녁의 가장자리와 중앙을 맞추며 기예를 펼치고 재능을 자랑하는 것을 본 것이 바로 조금 전 같이 역력하다.

지난 50년간 빛바랜 풍운의 시절을 돌아보니 이른바 전쟁터에서의 방패와 창과 도끼가 이미 용도 폐기의 물건이 되어 버리고 포탄 연기와 총탄의 비가 자욱이 매일 올라온다. 현대 청년들의 손은 활을 다룰 줄 모르고 예전의 무예 연습장은 풀이 우거져 기러기와 고니만이 날개를 펴니 그 누가 능히 활을 당겨 쏠 수 있으리오.

여든 노인들은 활을 걸고 벽을 바라보면 실로 마치 마구간의 늙은 준마 같아 누워서 수많은 싸움의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면 절로 외마디 포효가 나오는 것을 금치 못한다. 이에 동지들과 함께 늘그막에 어떻게 지내는 것이 멋스러운 취미일까를 도모하였는데 저 바람 난간, 달 정자에 시인과 묵객들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시구를 가다듬는 것은 스스로 불평이 있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니 실로 봄에 강이 비단 같고 가을에 산이 그림 같고, 석양에 앞길을 비출 때 팔에는 활을 들고 허리에는 화살을 차고, 천금을 내어 술을 사고 취흥이 도도하게 일면 앞에 과녁을 그려 다섯 발을 연이어 쏴서 맞추고 가득 모인 사람들이 갈채하면 이 어찌 통쾌하지 않으리오.

(그렇게 말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좋다’고 하였다. 각자 자원하여 추렴해 공산 남쪽 기슭에 정자 하나를 세우니 나는 듯 환하고 널찍하고 웅장 화려했다. 이에 낙성식을 거행하니 모두들 축사하여 말하기를 “일찍이 이름난 정자와 뛰어난 건물을 보면 왕래가 빈번하여 대부분 아버지가 그 아들을 훈계하고 아들은 그 손자에게 전하여 아버지의 위업을 자식이 계승하는데 (여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어지면) 우리 스스로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우니 우리는 이 정자를 세상에 공개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와서 영원히 수호하게 하고 연예와 관덕과 음악을 함께 향유하게 합시다”고 하였고 협회에 취지를 진술하여 마침내 특별히 크게 쓰기를 관풍정이라 하였다.

손님 가운데 곤란하게 생각한 사람이 있어 말하였다. “지금 마룻대를 올리고 서까래를 얹어 집을 지은 것은 대장(주역의 괘 중 하나인 대장괘를 말하는 듯)에서 취하여 활과 화살로서 세상에 위엄을 보이고 규괘(주역의 규괘: 한자 暌卦는 睽卦의 잘못)에서 취하여 남김없이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 대포가 하늘을 울리는 때인지라 비록 멀리서 버들잎을 쏴서 뚫는 신궁이라 해도 실로 평성(平城: 한 고조가 포위를 당했던 전장)의 방패와 도끼와 같고(방패와 도끼를 들고 적 앞에서 춤을 추니 적이 감화되어 항복했다는 고사가 있는데, 그럼에도 평성 같은 전장에서 그런 것이 통할 수 없다는 뜻의 말. 곧 소용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 월나라 사람에게 장보관이 맞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월나라 사람은 모두 단발이라 장보관이라는 모자가 필요 없었다고 함. 이것 역시 전혀 쓸모없는 것을 뜻함). 어찌 정자를 관풍의 두 글자로 편액한 것인지요. 자사(벼슬 이름)께서 하신 일은 아마도 적절하지 않은 듯합니다.”

내가 말하였다. “활과 화살은 비록 전쟁 때 필요한 것이라 하지만 본래는 자신을 바르게 함을 나타내어 덕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성인께서는 육예의 과목에 포함시키셨습니다. 만일 전쟁에서 용맹함을 떨치는 것을 능사로 여겼다면 공자께서 위령공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군대의 일은 내가 배우지 않았습니다’고 했지만 어찌 확상포(공자가 제자들과 활쏘기를 한 곳)에서 활쏘기가 있었겠습니까. 편액에 관덕이라는 것이 많은데 만일 이를 취하지 않는다면 요동의 돼지와 같습니다(견문이 좁아서 세상 물정을 모름에 대한 비유임).

이 관풍이라는 것은 자사께서 임금의 은덕을 널리 펴고 백성의 기풍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정자에 올라 삼대(三代)에 행해지던 향사(鄕射)의 유풍(선인이 남긴 풍속)을 볼 것입니다. 보는 바는 각자 다르지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객이 “네, 그렇습니다” 하고 물렀다. 그래서 그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 1966년 제12회 백제문화제 중 관풍정 활쏘기 대회. <사진제공=공주학연구원>

옛 사정을 준공한 1936년 음력 6월 79세의 남평 문재덕이 쓴 것으로 기록된 이 ‘관풍정기’에는 “나 또한 젊었을 때 선수생활을 하면서 장대(將臺)에서 세 번 호령을 하면 활쏘기에 뛰어난 이들이 좋은 활을 서로 당겨 과녁의 가장자리와 중앙을 맞추며 기예를 펼치고 재능을 자랑하는 것을 본 것이 바로 조금 전 같이 역력하다”고 적어 공주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활쏘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다만 “현대의 청년들의 손은 활을 다룰 줄 모르고 예전의 무예 연습장은 풀이 우거져 기러기와 고니만이 날개를 펴니 그 누가 능히 활을 당겨 쏠 수 있으리오”라며 사라져버린 활쏘기 전통에 대한 애석함도 표현하고 있다.

1991년 작성된 ‘관풍정이전신축경기’의 내용은 이 같은 공주 지역의 활쏘기 전통을 관풍정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것 아닌가 판단되는 대목이다. ‘풀이 우거져 기러기와 고니만이 날개를 펴고 있다는 예전의 무예연습장’을 넓은 의미에서 활터, 곧 첫 관풍정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싶다.

▲ 사대 왼쪽 주차장에서 본 관풍정 무겁. <사진=한정곤 기자>

그러나 사정 건물의 존재여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옛 사정에 걸린 ‘관풍정기’ 어디에도 관련 언급이 없고, 특히 ‘관풍정’이라는 현판은 1936년 처음 지어 내걸었다는 내용이 한결같이 적시돼 있기 때문이다.

율당 서덕순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하나로 합쳐지고 서로 재물을 내놓아 날아갈 듯한 정자 하나를 얼마 걸리지 않아 봉산의 북쪽 금강의 남쪽에 만들고 편액하기를 관풍정이라 하였다”고 했으며 만초 정한명은 “이에 관덕(觀德)과 관풍(觀風)의 뜻을 써서 정자의 이름을 짓는다”고 기록했다.

남평 문재덕 역시 “우리 스스로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우니 우리는 이 정자를 세상에 공개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와서 영원히 수호하게 하고 연예와 관덕과 음악을 함께 향유하게 합시다 하였고 협회에 취지를 진술하여 마침내 특별히 크게 쓰기를 관풍정이라 하였다”고 자신들이 지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 관풍정 옛 사정의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 ‘예전의 무예연습장’이 최초의 관풍정?
1937년 ‘관풍정기’를 쓴 율당(栗堂) 서덕순(徐悳淳)과 만초(晩樵) 정한명(鄭漢明)은 공주 출신으로 확인된다.

율당 서덕순은 1892년 공주에서 출생해 1969년 서울에서 별세한 초대 충남지사다. 공주시 중동 제민천변의 생가처에 설치된 안내표지석에 따르면 공주 3·1만세운동과 신간회 운동에 참여하여 계몽과 민족운동에 기여하고 공주사범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만초 정한명은 1892년 공주에서 출생한 지역의 대표적인 대지주로 알려져 있다. 선대로부터 많은 토지를 물려받아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 말 기준으로 76㏊의 전(田), 39㏊의 답(畓) 등 166㏊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공주 지역의 다른 대지주들과 함께 남선제사라는 회사에 자본을 투자하고 이사를 역임한 사업가이기도 하다. 영명학교에 상당한 기부금을 내는 등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었으며 1939년에는 공주읍회 회원으로 선출됐다.

1936년 ‘관풍정기’의 작자인 남평(南平) 문재덕(文在悳)은 동학농민혁명 발발 당시 이를 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 지휘부인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남긴 기록물인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 권10 ‘공적에 대한 기록’에 이름이 나온다.

조선시대 문과·무과·잡과(雜科) 등의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일컫는 출신(出身)으로 기록돼 있으며 별군관(別軍官)으로 재직하던 당시 공주에서 20명 이상의 동학군을 붙잡았다고 을사오적 중 한 명으로 당시 충청감사였던 박제순이 보고했다는 내용이다. 동일인물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가 쓴 ‘관풍정기’ 내용에서도 무관이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반면 1937년 쓰여진 또 다른 ‘관풍정기’의 지은이 일해(一海) 장우식(張佑植)과 1936년 ‘서(序)’·‘운(韻)’을 쓴 지운(芝雲) 박준식(朴準植)이 어떤 인물인지는 기록이 없다.

옛 사정에 걸린 현판은 1936년 건립 당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당(宇堂) 서만훈(徐萬勳)이라는 낙관이 선명하지만 역시 관련 기록이나 자료가 없다.

▲ 관풍정 전경. 신축 사정과 옛 사정 사이에 보이는 한옥은 복원한 충청감영의 선화당이다. <사진=한정곤 기자>

사실 활터의 역사는 사원(射員)의 자존심과 결부돼 있다. 관풍정보다 역사적으로나 도시 규모로나 별반 보잘것없는 강경 덕유정이 먼저 기사화됐다고 역정을 내던 노궁사의 불편한 심기도 여기서 출발한다. 그러나 유물로만 보존할 뿐 발굴하지도 않고, 왜곡됐을지도 모를 역사를 사실인 양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신생 활터의 새로 써가는 역사보다 나을 게 뭐가 있겠는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임선빈 전임연구원은 지난 2014년 『조선시대사학보(朝鮮時代史學報)』에 게재한 ‘인조의 공산성 주필과 후대의 기억’이라는 논문에서 “인조의 공주파천과 관련한 학술적인 연구는 그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공주지역에 전해지는 관련 이야기들도 대개 민간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일부는 지역 주민의 정체성과 지역 발전에 기여한다는 명분하에 문화콘텐츠로 포장되어 재생산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이중환의 『택리지』에 인조의 공산성 주필에 대한 설명과 인절미·도루메기 전설을 지적한다. 모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역사적 실재 여부와 상관없이 민중들의 소박한 역사의식을 반영해 항간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한층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혹여 관풍정도 이 같은 범주에 포함되지 않을까 우려가 앞선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기록물이 사라져 창건 시기를 구전에 의존하고 있는 활터가 대부분이지만 이 가운데 일부 활터에는 구전이라도 기록만 존재하지 않을 뿐 이를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관풍정 역시 1991년 작성된 ‘관풍정이전신축경기’가 역사적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1936년과 1937년의 ‘관풍정기’가 창건기가 아닌 이건기라는 최소한의 무언가가 발굴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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