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
“봉래도의 신선을 부르는 활터”…순천 환선정[활터 가는 길]② 빗나간 화살이 부른 민원…“팔마종합운동장서 재창정”
한정곤 기자  |  jkhan@iheadlinenew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5.25  07:52:44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블로그 구글 msn
   
▲ 폐쇄된 순천 죽도봉의 환선정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활터 가는 길]② 빗나간 화살이 부른 민원…“팔마종합운동장서 재창정”

어디서 나타났는지 들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남은, 으스스한 기운마저 감도는 곳에서 갑작스럽게 출현한 들고양이는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마을처럼 횅한 건물 곳곳에는 온갖 잡풀과 쓰레기들이 무성했다. 들고양이에 덴 뒤라 마치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나타날 것만 같은 두려움에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까지 조심스러웠다.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 무섭다’는 옛 동네어른들의 말을 떠올려보지만 폐허 속의 정적이 가져다주는 공포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사람이 주인이었던 곳이 이제는 주인 없는 동물과 버려진 듯한 사물로 바뀌었다.

475년의 역사를 따라 지난 세월 이곳을 스쳐간 이들만도 수천수만 명에 달했을 텐데 이처럼 폐허로 방치돼 있는 모습에서 쓸쓸함 이외에 다른 감정은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다. 빗나간 화살 하나가 초래한 엄청난 결과였다.

멀리 휘돌아 흐르는 동천(東川)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청준의 소설 『과녁』 끝부분을 떠올렸다.

“주호는 시위를 매섭게 퉁겼다. 그러나 그 두 번째 화살도 과녁을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아니, 그 화살은 어쩌면 어김없이 그의 과녁을 적중시킨 셈이었다. 거기 또 하나의 과녁이 있었다. 주호는 그 과녁이 지금껏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의 화살을 받은 것 같았다. 그 순간 소년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 쓰러지는 모습은 묘하게 아름답고 그래서 더욱 처참한 느낌이 들게 했는데 그것은 그가 쓰러질 때 먼저 두 다리를 꺾어 잠시 꿇어앉아 있는 듯하다가 이내 앞으로 폭 고꾸라진 동작의 순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그때, 어느 영화에선가 사냥꾼의 총에 번쩍 피를 뻗치며 무릎을 꿇는 듯 넘어진 새끼 노루를 생각해 냈을지도 모른다.”

전통적 아름다움을 가진 활터 북호정을 중심으로 현대 문명의 파괴성과 현대인의 위선을 비판한 소설은 어쩌면 편리함만을 앞세운 현대인들이 전통의 가치를 자신도 모르게 하나하나 지워나가고 있는 일탈에서 느끼는 쾌감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살을 맞은 소년이 쓰러지는 모습에서 어떻게 “묘하게 아름답고 그래서 더욱 처참하다”는 감정이 일 수 있을까.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의식을 상실한 모순된 형용사를 통해 일탈의 쾌감이라는 해석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역사를 바꾼 2015년 1월 상사대회
일요일 점심시간이 막 지날 무렵 찾은 전남 순천시 죽도봉의 환선정 진입로는 예배를 마친 개신교회 신자들 한 무리로 떠들썩했다. 이리저리 엉킨 자동차들을 피해 죽도봉 경사면을 타고 올라서자 주차된 자동차 두 대가 길을 막고, 그 뒤편으로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붉은 팻말을 달고 있는 스테인리스 파이프가 가로놓여 방문객의 앞을 또 가로막았다.

   
▲ 입구를 가로막은 차단봉에 걸린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붉은 색 팻말이 섬뜩하다. 아래는 사대 서쪽 쪽문을 쇠사슬이 채워져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팻말 옆에 내걸린 플래카드엔 “환선정 방문 안내”라는 제목으로 안전상 습사가 금지됐다며 팔마운동장 내 임시 국궁장으로 인도하는 글귀가 바람에 흩날렸다. 죽도봉으로 걸어 올라가는 환선정 사대 서쪽 쪽문인 낡은 철문에도 굳게 고정시킨 쇠사슬이 채워져 단단히 출입을 단속했다. 지난 2015년 4월부터 현재까지 환선정 입구에 버티고 선 수문장(?)들이다.

이들 수문장이 들어서기 3개월 전인 그 해 1월25일 오후 환선정은 월례 상사대회로 잔치 분위기였다. 그러나 죽도봉 환선정의 역사가 이날 또 한번 뒤바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회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이었습니다. 사대에 오른 한 사원의 실수로 화살이 과녁을 한참 빗나가면서 교회 신자 자녀로 알려진 10세 초등학교 여자아이를 스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임철순 순천 환선정 사두의 말이다. 물론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은 이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안전사고에 대한 인근 마을 주민들의 민원은 수차례 반복됐다. 2014년 10월엔 순천시의회 의원이 환선정 인근에 민가와 교회가 있어 화살로 인한 사고 위험이 크다며 이전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환선정의 역사성과 예산을 이유로 이전에 반대입장을 분명해 했던 순천시도 이날 사고 이후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결국 환선정 폐쇄를 결정해야 했다.

3년여 방치된 죽도봉 환선정은 ‘관리’라는 단어가 더 이상 차지할 공간이 없는 ‘폐허’ 그대로였다. 입구를 가로막은 스테인리스 파이프를 넘어서자 오른쪽으로 3개의 과녁 홍심이 무심한 듯 죽도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자란 풀들이 서로 키를 재며 과녁 하단 3분의 1까지 자라 무겁은 궁사들의 발길이 끊긴 오랜 시간을 짐작케 했다.

   
▲ 과녁 하단 3분의 1까지 자란 풀들이 무겁을 뒤덮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무겁 앞에서 바라본 죽도봉 중턱의 고풍스런 환선정은 오월의 푸른 숲에 잠겨 괴괴했다. 전형적인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으로 1층과 2층 모두 4면이 개방돼 있는 누각은 주인 잃은 티를 제대로 내고 있었다. 1층엔 먼지를 뒤집어 쓴 철제의자 몇 개가 버려져 있고 그 옆으로 각종 기물들이 널부러져 있는가 하면 2층엔 소파와 부러진 나무조각 등 온갖 쓰레기가 옛 영화를 대신했다.

松間畫閣出雲衢(송간화각출운구) 솔숲 사이 그림 누각 구름 높이 솟았거니
蓬島飛仙定可呼(봉도비선정가호) 봉래도의 나는 신선 부를 수 있으리라
酒醒夜深揮燭退(주성야심휘촉퇴) 술은 깨고 밤 깊기에 촛불 불어 꺼버린 채
坐看晴月滿平湖(좌간청월만평호) 맑은 달빛 호수 위에 가득한 걸 바라보네

이곳이 정말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재의 전형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한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년)가 1614년 환선정에 올라 쓴 시처럼 신선을 부를 수 있는 곳인가 싶을 정도다. 환선정(喚仙亭)은 ‘신선을 부르는 정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현재 죽도봉 환선정과 달리 과거 자료 사진으로 본 환선정은 전혀 달랐다. 1900년대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사진에서는 2층 누각이 아닌 정면 3칸 측면 3칸의 1층 정자 건물이다. 다만 측면에 꽤 높은 계단이 조성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면보다는 조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 1900년대 촬영된 환선정. <출처 미상>

어쨌든 누각 2층에서 바라본 카메라의 파인더 창에는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동천의 물줄기가 정면으로 흘러나가는 순천시내의 아름다운 풍경화 한 폭이 담겨졌다. 지금이라도 부르면 금방 달려오는 신선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성동(城東)에 봄이 와 풍경이 좋은 복사꽃 피었는데 나그네 누각(樓閣)에 오르네. 흰구름 뭉게뭉게 하늘에서 피어오르니 신선(神仙)이 나를 위하여 머물러 있는 것 같네.”

이쯤에선 기대승의 7대손으로 사헌부 지평을 지낸 겸재 기학경(1741~1809년)의 시구절도 절로 나온다.

그러나 방치된 환선정을 둘러보게 되면 오히려 조선말기 문인으로 1880년 순천부사에 임명된 김윤식(金允植: 1831~1900년)이 읊은 시가 더 적절하다.

神仙消息杳茫邊(신선소식묘망변) 신선 소식은 저 멀리 아득한데
憑檻回頭憶壯年(빙함회두억장년) 난간에 기댄 채 머리 돌려 젊은 날 추억하네
碧樹沉沉藏畫閣(벽수침침장화각) 어두운 숲은 화려한 누대를 감추고
夕陽冉冉下漁船(석양염염하어선) 뉘엿뉘엿 석양은 고깃배에서 내려왔네

   
▲ 환선정 2층 누대에서 바라본 순천시내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누각 앞에 사대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1층 콘크리트건물 안에는 3년 전까지 환선정 사원들이 드나들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사두의 책상 뒤로 역대 사두의 사진이 벽을 따라 길게 내걸렸고 앞으로는 사원들이 휴식을 취했을 소파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궁방으로 보이는 곳엔 궁창과 도지개 등 기물들이 구르고 오른쪽엔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는 식당으로 보이는 공간이 애타게 주인을 부르고 있었다.

순천시는 활터 이전 계획에 따른 죽도봉 일대 활성화를 준비해 지난해 국비 지원 사업으로 확정됐고 2019년까지 총 38억원의 사업비를 투자할 계획이다. 지난해 9월에는 시민토론회도 개최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사업에는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475년 역사의 환선정은 활터로서의 기능을 잃은 채 박제화 과정만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으로 1층과 2층 모두 4면이 개방돼 있는 환선정 누각. <사진=한정곤 기자>

환선정 폐정 이후 구성된 건립추진위원회 박홍준 위원장이 건네준 연혁비 초안에 따르면 환선정은 여느 활터와 같이 형극을 길을 걸었다. 화재로 불타고 수해에 쓸려가고 민원에 쫓겨가고 불교 포교당으로 전용되는 고초가 연혁비 안에 담겨있다. 다음은 환선정 연혁비 초안 전문이다.

“환선정은 1543년 중중 38년 순천부사로 부임한 심통원이 삼산이수가 합류한 현 동외동 28번지 동천변에 강무정(환선정)과 영선각을 창건하였다. 1592년 전라감사 이광의 초청으로 이순신 장군께서 순천에 방문하여 정사를 협의하고 활도 쏘았다. 1596년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 왜성대에 진을 친 왜병의 전황을 탐지하고자 순천에 머물면서 습사도 하셨다.

이듬해 1597년 정유재란시 왜군의 침공으로 환선전이 전소되었다. 그 후 1612년 광해군 4년에 부임한 유순익 부사가 중건, 1761년 구수국 부사, 1826년 김정균 부사, 1885년 고종 22년 부임한 이범진 부사가 중수하여 친필로 환선정 비사리 현판(357×115×2cm)을 만들어 게시하였는데 1962년 8월28일 대홍수로 건물은 유실되고 현판만 남아 죽도봉 공원 환선정에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에 우리문화 말살정책과 환선정 부지를 약탈하여 심상소학교(일본학교) 신설비용으로 충당했기에 1935년 지방유지 김종익 외 17명이 성금을 모아 죽도봉 중록인 조곡동 278-2번지(흥륜사 자리)에 궁도장을 신설해 활용하던 중 민원으로 1983년 3월 안주섭 순천시장 재임 중 조곡동 278-25번지로 이전하여 궁도장으로 이용하였고 95대 허진명 사두 외 44명의 사원 성금과 정 자원으로 1988년 3월 환선정 복원과 영선각을 완공하였다.

2015년 1월 민원으로 조충훈 순천시장 재임 중 연향동 667-2번지 일원에 부지 17.933㎡ 건물 485.99㎡ 총공사비 45억원으로 2018년 1월 준공 이전하면서 이범진 부사의 친필 환선정 편액을 탁본으로 새겨 건물 중앙에 게시하고 선인들의 높은 뜻과 475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전 사원의 정성을 담아 연혁비를 세운다.”

   
▲ 환선정 2층에 걸려 있는 ‘환선정 연혁’ 편액. <사진=한정곤 기자>

연혁비 초안에는 없지만 1913년 환선정은 송광사와 선암사 승려들의 포교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일제가 1912년 사찰령을 반포하고 조선 임제종을 해체시키자 경운 스님이 대중포교를 위해 송광사와 함께 순천에 있던 환선정을 매입해 포교당을 건립한 것이다.

지난 2012년 11월 입적한 경운 스님은 일제시대 만해 한용운 스님 등과 더불어 임제종을 설립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지켜내고 근대한국불교의 화엄 종주로 추앙받던 스님이었다. 그러나 1950~1960년대 비구·대처간 갈등 끝에 사실상 태고종이 차지한 선암사 문중 스님이었던 탓에 근대한국불교사에서는 크게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한국불교를 이끌고 있는 조계종으로선 선암사 문중이었던 경운 스님을 추앙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 창건과 편액 글씨 주인공들의 비극적 삶
우연의 일치일까. 환선정 창건을 주도하고 현판 글씨를 쓴 이들의 삶도 우여곡절을 겪으며 초기의 영광과 달리 말로는 비극적으로 마감했다. 천재 소년에서 3흉(凶)으로, 왕비의 총애를 받던 신진 청년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들의 삶에서 그동안 환선정이 겪었던 온갖 고초가 엿보인다.

환선정을 창건한 심통원(沈通源: 1499~1572년)은 조선 중기의 권신이자 척신이다. 호는 욱재(勗齋)이며 어려서부터 천재로 불렸고 1537년(중종 32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순천부사로 부임해 환선정을 창건한 것은 이로부터 6년 뒤였다.

1546년(명종 1년)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부응교(副應敎)로 등용된 뒤 시강관(侍講官)으로 임금의 학문을 돕다가 직제학이 되어 조정의 공문서를 도맡아 작성하기도 했다. 그 뒤 병조참지로 국방에도 관여했다. 1548년 우승지·좌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1550년 예조참판이 됐으며, 이어 대사헌·형조참판·한성부판윤을 거쳐 우의정까지 올랐다. 같은 해 좌의정이 됐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러나 1565년 왕의 외척으로 윤원형 등과 함께 권력을 남용했다는 탄핵을 받고 사직했으며 1567년 선조 즉위 후에는 율곡 이이 등의 탄핵을 받고 관직마저 삭탈당했다. 서인의 초대 당수 심의겸·심충겸 형제와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종조부이기도 하다. 이량·김안로·윤임·윤원형·윤원로 등과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척신 세력이었으며, 특히 이량·윤원형 등과 함께 3흉으로도 불린다.

   
▲ 357×115×2cm에 달하는 이범진의 해서체 글씨의 대형 현판. 여전히 환선정 2층에 걸려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환선정의 현판 글씨의 주인공인 이범진(李範晋: 1852~1911년)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이며 순국지사로 자(字)는 성삼(聖三)이며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7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1879년(고종 1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고 1895년 명성황후가 친러 정책을 쓸 때 대신 서리가 됐지만 그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 친일파가 정권을 잡은 후 파면됐다. 환선정 현판은 파면되기 8년 전 순천부사 시절 쓴 것으로 전해졌다.

그 해 10월 다시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한 이범진은 러시아로 망명했지만 1896년 귀국해 러시아와 힘을 모아 친일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내각을 세워 법무 대신이 됐다. 그러나 친일파 등이 득세하면서 신변이 위험해지자 자원해 1896~1897년 주미 공사로 임명받아 그 후 3년 동안 미국과 유럽나라의 대한제국의 외교관 역할을 했다.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압력이 높아지자 일본 견제를 위한 러시아 외교 강화 차원에서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상주공사로 파견돼 초대 주 러시아 상주 공사관으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이때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비밀리에 고종 황제의 친서를 전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연해주 지역의 항일운동을 적극 후원했으며, 그 중에는 해조신문 후원, 동의회의 조직과 활동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독립운동 자금도 지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러일 전쟁 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러시아 방면에서 방랑생활을 하던 이범진은 1911년 1월13일 한일합방 이후 나라 잃은 슬픔으로 밧줄에 목을 맨 다음 머리에 권총 3발을 쏘고 자결했다. 반일투쟁의 수단으로 자결을 택한 그의 자살을 두고 당시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는 “적들에게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복수를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해는 페테르부르크에 안장돼 있다.

그가 썼다는 해서체 현판은 여전히 환선정 2층에 걸려있다. 29~33×1.15cm의 비사리목 11개를 이어붙인 현판에는 그의 낙관도 양각으로 선명히 남아있다.

◇ 바람골 터전서 전국 4대 사정의 영광 재현
이청준 소설에 등장하는 고전 소년의 죽음이라는 최악의 비극은 아니었지만 활터 폐쇄를 피하지 못했던 죽도봉 환선정은 새로운 터전을 잡고 재창정의 길을 걷고 있다. 올해 4월 순천시 팔마로 333번지 팔마종합운동장 북쪽 산중턱에 다시 현판을 내건 것이다. 어느 사원은 지나가듯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입주했다고 표현한다.

   
▲ 팔마종합운동장 북쪽 산 중턱에 한옥 콘크리트 건물로 조성된 환선정. <사진=한정곤 기자>

현대식 한옥 콘크리트 건물로 웅장하게 재건된 환선정은 사두 사무실을 비롯해 궁방과 휴게실에 탕비실까지 시설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입구 안내문에는 “평양 연광정, 전주 천양정, 서울 황학정과 함께 대한민국 4대 정”이라는 소개와 함께 “미래의 1000년을 바라보고 정진할 것”이라는 다짐도 내걸었다.

4개의 과녁은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 10도 방향에 설치됐으며 여름철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겨울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 순천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바람골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팔마종합운동장 부지가 그만큼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는 의미다. 실제 환선정을 방문했던 날 습사를 하면서 바람골이라는 이름값을 실감했다. 2관 사대로 올라선 3명의 사원과 함께 한 습사에서 대부분의 살은 3관 근처에 떨어졌다. 오히려 1관 오른쪽을 겨냥한 살이 2관 홍심을 적중했다.

   
▲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 10도 방향에 설치된 4개의 과녁. <사진=한정곤 기자>

현재 환선정 사원은 여무사 8명을 포함해 80여명으로 110대 임철순 사두가 이끌고 있다. 지난해 취임한 임 사두는 호남지역의 명문 고등학교로 명성이 높은 순천고 교사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2007년 집궁했다. 이후 2009년 전국 김제시장기 전국궁도대회 장년부 1위, 제5회 국궁백일장 노년부 장원, 전북 임실군수기 전국궁도대회 노년부 1위에 오른 공인 4단의 실력자다.

팔마종합운동장 이전 건립이 완료되면서 임 사두는 환선정의 외연 확장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지난해에는 순천이 전라선의 거점 도시지만 제외돼 있었던 ‘전라선 주변 9개 정 친목 궁도대회’에 가입하고 올해 145회 대회를 유치하는가 하면 서울 황학정·전주 천양정과의 자매결연 의지도 내보였다.

임 사두는 “전국 4대 정 가운데 평양 연광정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정은 남한에 있다”면서 “이들 정과 자매결연을 맺고 정기적으로 교류전을 갖는다면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죽도봉 환선정의 현판을 탁본해 제작한 현재의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재창정 원년을 맞아 활기가 넘치는 환선정은 지금까지의 고난을 끝맺고 예전에 노닐던 신선이 다시 찾아오고 함께 습사를 하다 옆 친구가 신선이 되는 활터를 꿈꾸고 있다. 모두가 선사(善射)가 된다면 모두가 신선(神仙)이 되고 멀리 있는 또 다른 신선을 부르며 제 모습을 찾아가지 않을까.

송규암(宋圭庵)·김하서(金河西)의 시에 차운(次韻)한 조선 중기 정계 거물인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1601년)의 시는 이 같은 환선정의 재창정을 노래하는 듯하다.

狂流何日蕩樓船(광류하일탕루선) 광류가 언제인가 누선을 뒤흔들었는데
好事猶傳昔者賢(호사유전석자현) 호사자는 아직도 옛 현인의 일을 전하네
高起一亭當水面(고기일정당수면) 높이 솟은 정자는 수면에 접해 있고
却望平野渺山前(각망평야묘산전) 바라보는 평야는 산 앞에 아득하네

客行濡滯心常遠(객행유체심상원) 나그네 걸음 늦어져도 마음은 늘 즐거운데
故國興亡夢自牽(고국흥망몽자견) 고국의 흥망은 절로 꿈속에 들게 하네
歸去火城成十里(귀거화성성십리) 돌아갈 제 화성이 십 리나 이어지니
傍人喚作小神仙(방인환작소신선) 옆 사람이 작은 신선이 되었다 하네.

   
▲ 활터로서의 기능을 잃은 채 박제화 과정을 기다리고 있는 죽도봉 환선정이 오월 녹음에 파묻혀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관련기사]

한정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블로그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61(경운동, 운현궁SK허브오피스텔 101동 322호)  |  대표전화 02-720-1745  |  팩스 02-720-1746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한정곤  |  발행처:헤드라인미디어
등록번호:종로라00428(등록일자 1998년 2월25일)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서울아03173(등록일자 2014년 5월29일)  |  발행일자:2013년 11월26일
Copyright © 2013 헤드라인미디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