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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옛 흔적뿐인 활터…영암 열무정[활터 가는 길]③ 읍성 개발에 ‘박제화’ 보존…규격화된 활터 신축 이전
한정곤 기자  |  jkhan@iheadlin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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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12  08: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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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3월 준공식을 가진 영암종합스포츠타운에 조성된 영암 열무정 전경. <사진=열무정 배원식 사두 제공>

[활터 가는 길]③ 읍성 개발에 ‘박제화’ 보존…규격화된 활터 신축 이전

나의 서울생활은 1980년대 중반 청계천7가에서 시작됐다. 서울 물정 모르는 시골 촌놈이 지금은 철거된 삼일고가도로 북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삼일아파트에 덜커덩 전세방을 얻었다.

말이 아파트였지 살림집은 없고, 집집마다 가내수공업 수준의 봉제공장들이 빼곡히 들어 앉아 있었다. 밤낮으로 돌아가는 미싱과 삼일고가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뿜어내는 돌비 서라운드 시스템에 의한 입체 소음은 결코 편안한 잠자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꼭 1년을 견디며 살았다.

그렇다고 그곳에서의 1년이 나쁜 기억으로만 남아있지는 않다. 심심찮게 둘러보는 재미와 필요한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었던 길 건너편의 황학시장 때문이었다. 도깨비시장 혹은 벼룩시장으로 불렸던 황학시장은 별칭 그대로 중고품 천지였다. 이런 것도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나 싶을 만큼 어린 시절 흔했던 폐가의 케케묵은 문짝을 비롯해 최신 전자제품까지 정말 없는 게 없었다.

물론 나의 전셋집에도 황학시장을 둘러본 전리품들이 하나둘 자리를 차지했다.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구입했던 수많은 LP 음반들은 지금도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으며, 청동으로 빚어낸 중세 기사상은 오디오 위에서 여전히 그 위용을 뽐낸다.

간혹 청계천7가를 지나칠 때면 잠깐씩 황학시장 안을 기웃거려본다. 그러나 번잡하고 왁자지껄했던 그 시절의 정취는 사라지고 없다. 청계천 정비사업으로 길거리 상인들은 신설동에 조성된 풍물시장과 길 건너편 동묘 골목으로 쫓겨났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시장은 모든 게 부실하다. 규격화된 가게와 상품에는 감동이 없다. 동묘 골목의 벼룩시장이 그나마 비슷한 흉내를 내고 있지만 역시 흉내뿐이다.

30대까지는 미래를 먹고 살지만 40대부터는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일상의 흔적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불현듯 그것의 소중함을 느꼈을 때 기억할 아무런 흔적도 없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화려한 첨단기술이 삶의 소소한 멋까지 빼앗아버리는 개발·재개발 사업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보존이라는 가치 앞에서 모든 걸 가두고 박제해 버리는 영리함과 그럴듯한 보존지정 일련번호를 매겨놓은 안내문구로 미래 세대를 향한 책임을 다했다는 천박함으로 자위하면서 말이다.

활터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어쩌면 불과 수년 뒤면 전국의 모든 활터가 온갖 종목이 한 곳에 집결된 체육공원으로 옮겨갈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곳의 중심부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안전이라는 민원에 쫓겨 가장 외진 한쪽 귀퉁이에 겨우 둥지를 틀 뿐이지만 이마저도 감지덕지하게 되지 않을까.

◇ 체육공원으로 옮겨가는 활터들
순천 환선정에서 마주해야 했던 가슴 한 구석의 무거운 돌덩어리를 내려놓지 못한 채 전남 영암 열무정(閱武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이미 지워져 버린 케케묵은 흔적을 찾아가는 것만 같았다.

광주광역시를 출발해 목포로 향하는 광목간 도로를 따라 30~40분여를 달렸을까. 나주시를 지나 신북면 표지판이 보일 즈음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달이 뜨는 산’이라는 월출산(月出山)이었다.

   
▲ 무겁 쪽에서 바라본 열무정. 웅장한 월출산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진=한정곤 기자>

한반도 최남단의 산악형 국립공원인 월출산은 천년 이상의 역사와 국보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도갑사와 무위사 그리고 국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국보인 마애여래좌상을 품고 있다. 주변에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선사유적을 비롯한 옛 사람들의 풍물과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자연과 역사와 문화를 어우르는 남도답사 출발지로 불린다.

특히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능선상의 바위경관과 영암·강진 벌판의 아름다운 전원경관 조망이 일품이며 국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구름다리와 구정봉의 아홉 개 물웅덩이 그리고 미왕재의 억새밭은 명소로 알려져 있다.

영암읍 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월출산의 품에 채 안기지도 않았건만 열무정이 들어선 역리 일원의 종합스포츠타운에 도착해 버렸다. 지난 2014년 3월 준공식을 가진 영암종합스포츠타운은 7만1000㎡(2만1900여평)의 부지에 국궁장, 축구장, 야구장, 테니스장 등이 조성돼 있다.

5월 어느 월요일 아침의 따사로운 햇살이 과녁에 쏟아지고 있는 열무정엔 연세 지긋한 3명의 사원이 1관에서 습사를 하고 있었다. 한 순을 낸 뒤에는 번갈아 한 명씩 연전(揀箭)을 다녀오는 모양새가 질서 잡힌 활터임을 짐작케 했다.

전통 맞배지붕 양쪽으로 우진각지붕이 겹쳐진 한옥 콘크리트건물 형태의 사정(射亭) 건물 내부에는 중앙 홀 격인 휴게실이 널찍하게 들어섰고 왼쪽에는 사두실을 겸한 사무실이, 오른쪽으로는 노인회와 사포계 사무실 등이 배치돼 있다. 궁방과 사원들의 개인사물함은 물론 주방이 딸린 식당 공간도 갖춰졌다. 2층 넓은 공간은 궁방 겸 휴궁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각종 대회를 개최하는 데에는 부족할 것 없이 넓고 여유로운 최신 활터다. 다만 아쉬운 것은 최근 건립된 활터들이라면 똑같겠지만 열무정에서만 느낄 수 있는 습사의 특징을 찾을 수 없는 평이함이었다.

   
▲ 사대에서 북서쪽으로 60도 방향에 배치된 과녁. <사진=한정곤 기자>

어쩌면 이미 인공적으로 규격화된 활터가 보편화되고 있어 부질없는 트집 잡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국 400여개 활터마다 고유한 지형에 따라 습사 방법까지 달라진다면 활쏘기 유람은 한층 매력적이지 않을까.

살이 계곡을 넘고 바다를 건너고 바람을 피하고 햇빛을 따라 오르는, 또 연전길은 봄과 여름에는 울긋불긋 꽃길을 지나고 가을엔 풍성한 열매 주렁주렁한 과수원을 통과하는 자연친화적인 활터를 꿈꾸는 것은 나만의 허황된 사치일까. 마치 골프장처럼 국가와 지역에 따라 코스가 다르고 같은 골프장 안에서도 같은 골프코스가 없듯이 말이다.

◇ 연전길의 낭만 꿈꾸는 허황된 사치?
어쨌든 고른 평지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열무정의 과녁은 착시현상 탓인지 유난히 커 보였다. 열무정 사원 송태근 접장과 함께 한 습사에서도 평소보다 시수가 좋았다.

배원식 사두는 “살이 떨어지는 지점이 다 보이고 과녁도 크게 보인다”며 “전남지역에서는 입·승단률이 높은 활터로 알려져 있다”고 열무정의 특징을 설명했다.

지난 1987년 집궁한 배원식 열무정 사두는 17년간의 휴궁 이력이 있는 궁사다. 활과는 무관한 일로 어깨를 다쳐 철심을 박았단다. 웬만큼 어깨가 나아졌다 싶었지만 활터에는 나오지 않았던 그가 고문들 성화에 못 이겨 다시 활을 잡은 것은 4년 전이다. 그런데 복궁 두 달 만에 등을 떠밀어 부사두 자리에 앉히더니 이듬해에는 내친 김에 사두까지 해보라는 우격다짐에 두 손 들고 현재 사두 직을 수행하고 있다. 복궁 이후에는 각종 대회에서 수차례 우승도 거머쥐었다.

최근 서울의 어느 활터에서는 일부 사원들의 반대에도 5년 이상 휴궁자 50여명을 무더기 제명시키기까지 했다는데 17년 휴궁 후 복궁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열무정은 사원들이 몇 년 휴궁하더라도 언제든 복궁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배 사두는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50여명의 휴궁자를 제명한 활터가 배 사두를 비롯한 여러 활터의 사원들에서는 믿기 어려운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인 결정이더라도 때때로 어느 곳에서는 현실이 되는 게 또 현실이다.

열무정은 사대에서 북서쪽으로 60도 방향에 과녁이 버티고 서 있다. 배원식 사두와 열무정 사원들에 따르면 바람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사대에서 과녁 방향으로, 11월부터는 과녁에서 사대방향으로 바뀌어 분다. 사대에는 하루 종일 햇빛이 들지 않지만 눈이라도 내리는 겨울철엔 사대까지 눈보라가 들이닥치는 북향 과녁의 특징도 강조한다.

사대에서 과녁 방향으로는 별다른 장애물 없이 시야가 탁 트인 것과 달리 무겁에서 사대를 바라보면 웅장한 월출산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영암 열무정이라는 사실도 이때서야 새삼 깨닫는다.

   
▲ 영암읍성 동북쪽 야트막한 언덕 위에 보존돼 있는 열무정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애초 열무정은 월출산을 바라보는 방향, 즉 북쪽 사대에 남쪽 과녁이었다. 남동쪽 30도 방향으로, 현재 영암종합스포츠타운의 활터와는 사실상 정반대 방향에 과녁이 서 있었다.

열무정의 본래 사정은 현재의 신축 사정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600여 미터 떨어진 영암읍성 동북쪽 야트막한 언덕 위에 보존돼 있다. 그러나 사정 외관만 볼 수 있을 뿐 내부는 커다란 열쇠뭉치로 굳게 갇혀 있다. 지난 1988년 3월 전라남도문화재 제160호로 지정돼 2009~2011년 군에서 대대적으로 중수한 후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 기록 없는 추정…‘호남 최고(最古)의 사정’
열무정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불분명하다. 다만 지금으로부터 483년 전인 1535년(중종30년)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열무정이라는 정호(亭號)도 이때 강진병영병사가 천거해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인조 때 건립됐다는 구전도 있다.

사정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건물의 기둥에는 8개의 주련이 걸려있고 사장의 넓이는 1600여평에 이른다. 내부에는 열무정중수기를 비롯해 29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 읍성 열무정 내부에 걸려 있는 ‘열무정중수기’. <사진=열무정사포계 황용주 공사원 제공>

‘사수(射手) 가선 박양식, 감동 사두 조순항, 장무(掌務) 박은수, 하광옥’ 등의 이름으로 적혀 있는 ‘사정중수기’ 내용을 전사(轉寫)해 초역(抄譯)한 내용은 이렇다.

“낭주는 남(南)으로 내려와 웅장한 고을로 우리나라 연해안에 중요한 지역이다. 풍속은 근검무화하고 인물은 깊이 삼가고 묵중하며 법도가 있어 매양 배움의 여가(餘暇)에나 농사에 바쁜 틈을 내어 노소(老少)가 다같이 모아 향사례(鄕射禮)를 베울었으니 군자의 거동이 질서정연한 덕행을 볼 수 있고 씩씩한 방패의 선비로서 잠시라도 무예를 익혔으며 읍양과 승강을 하였으나 이제 사정(射亭)이 없어 추위와 더위를 벗어날 가리개가 없던 차 지나간 무오년(1858년) 때 어사 성공이 국왕의 명을 받들고 본 고을에 잠행하여 그 활쏘는 의례를 보고 심히 마음이 기뻐 그 종적을 드러내 놓은 날 읍안 사람들을 초치해 놓고 무술을 권장하는 뜻으로 돈 육백(六百)량을 내어 영(營)으로 하여금 휴식할 곳으로 삼게 하니 군수 이공(李公) 또한 그 말을 듣고 기꺼이 창고에서 삼백(三百)금을 덜어내서 그 사업을 도와 성안 동쪽 시원하고 청쾌한 언덕에 사정(射亭)을 경영하여 세웠는데 이속(吏屬)들과 일반 군민들도 또한 의연금을 원납케 하여 그 부족한 액수를 보완코자 하니 이 가히 폭풍에 풀 쓰러지듯 우송을 통하여 서신을 전하는 것과 같은 속(速)함을 보아 몇 일이 아니되어 침식되고 벗겨져 기와와 기둥 그리고 주추마저 썩고 상하여 무너지고 넘어져 몇 해가 지났어도 이를 개보수하지 못하여 한탄만 하고 있던 차 정축년(1877년) 가을에 민공(閔公)께서 우리 고을에 군수로 와 보니 이 고을은 전 군수께서 아끼고 사랑하던 고이었으나 때에 큰 흉년이 들어 군민들은 곤곤하고 시골에서는 병들어 쓰러지니 병든 자들은 치료토록 하고 구제하니 흩어져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으나 낮은 곳은 물이 고이고 높은 곳은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겨우 개발하였는 바 무인년과 기묘년 간에 군내 일경이 풍년이 들어 인화한 군정이 이루어지고 백폐(百弊)가 다시 부흥되어 아사(衙舍)와 문루(門樓)를 차례로 정돈하고 계획을 세워 수리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사정도 무술을 배우는 곳이니 불가불 이제 보수하고 썩고 상한 곳을 바꾸자 하므로 무너지고 허물어진 곳을 제도에 맞추어 놓으니 옛과 같이 으리으리함이 거듭 새롭고 화려하며 대청과 창문이 옷깃을 시원하게 하고 강산이 그 빛을 잡아당기듯 하며 또한 정자 뒤로 한 낭사(廊舍)를 지어 수호자로 하여금 살게 하였으며 군민들에게도 노역을 시키지 아니하고 관청에도 번거롭지 않게 하였으며 새가 날개를 편 것과 같이 좌우(左右)로 넓혀 놓으니 헌(軒) 앞에 임하면 활을 쏘다 술잔을 드는 광경을 볼 수 있으며 명후(明候)께서도 가벼운 갓옷과 느러진 띠 차림에 풍도(風度)가 한아(閒雅)하고 문무를 다 겸비하셨으므로 정령(政令)이 관(寬)하였으며 때로는 자리 위에서 산보를 하시며 흥이 넘쳐 얕지 않으신 듯 하며 성상(聖上)께서 위에 계시사 문교가 대단히 밝고 사해(四海) 또한 편안하고 맑으니 동서남북과 중앙의 군사가 이미 쉬고 있어 위급함이 없으므로 이 정자를 두루 생각하는데 급급하도다. 아! 이 정자를 이 고을에서 세운 후 몇 백년 만에 비로소 성공(成公)과 이공(李公) 같은 이가 있어 성공이 새로 세운 후 몇 십년이 되었으나 다행히 민공(閔公)이 있어 중수를 하였음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의례가 앞뒤로 한마음에 통하였으니 이 어찌 정대(亭臺)를 보수하여 놓고 보는 뜻에 심상하랴. 이 뒤로도 현명한 군자들은 우리 삼공께서 행하신 군정을 본받는 마음이 지극하게도 인몰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성스러운 일이 아니랴. 성공의 함자는 이호요, 이공의 함자는 희빈이며, 민공의 함자는 창호였다. 세 기묘(1879년)구(九)월 기록하다.”

요약하자면 영암읍에서 향사례는 활발했지만 사정(射亭)이 없던 차에 성이호라는 이름의 암행어사가 기금을 내놓고 당시 군수였던 이희빈이 보탰으며 부족한 금액은 지방 관리들과 군민들이 의연금으로 출연해 사정이 중수됐는데 이후 폭풍에 쓰러진 사정을 민창호라는 군수가 부임해 다시 중수했다는 내용이다.

지난 2015년 열무정 사두를 역임한 황용주 사포계 공사원(公司員)은 사포계지 국역 등을 근거로 열무정의 창건연대가 1535년이고, 1935년 3월 열무정 중수기에 ‘호남에서는 가장 사정(射亭)이 오래돼 여러 번 개·보수했다’고 적혀 있다면서 “호남 최고(最古)의 사정”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지난해 12월 향토문화개발협의회가 펴낸 『향토문화』 제36집에 ‘영암 射亭(열무정) 창건 및 사포계에 관한 문헌고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60호 사포계문서 국역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할 만큼 열무정 연구에 몰두해 있다.

   
▲ 읍성 열무정에서 월출산. 남동쪽 30도 방향으로, 현재 영암종합스포츠타운의 활터와는 과녁의 방향이 정반대다. <사진=한정곤 기자>

논문에서 열무정의 1차 중수는 1858년, 2차 중수는 1879년 4월, 3차 중수는 1935년, 4차 중수는 2012년 4월이었다고 적고 있다. 다만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1710년(숙종36년) 열무정과 사장(射場)을 유지하기 위해 조직했다는 사포계의 설립동기를 통해 적어도 1710년 이전으로 추정했을 뿐이다.

열무정이라는 정호(亭號)에 대해서도 명확한 추정이 어렵다면서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1872년 영암군지도에 영암읍성과 영암읍성 동문밖에 열무정이라고 표시돼 있는 점으로 미뤄 1872년 전후로 추정했다.

그러나 ‘호남 최고(最古)의 사정’이라고 하기엔 창건연대로 제시한 1535년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차피 추정이긴 매한가지이지만 이미 고흥 봉황정(鳳凰亭)이 열무정보다 100여년 이상 앞선 1408년 창건으로 구전돼 오고 있기 때문이다.

   
▲ ‘丁斗七書’라는 글씨와 함께 낙관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열무정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열무정 현판 글씨의 주인공은 정두칠(丁斗七)이다. 현판 왼쪽에 ‘丁斗七書’라는 글씨와 함께 낙관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그러나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중수기를 쓴 송명회(宋明會)에 대한 정보 역시 과제로 남아 있다.

비단 이들 조선시대 인물만이 아니다. 열무정은 1982년 이전 사두들의 이름과 재임기간도 잃어버려 현 배원식 사두마저 자신이 몇 대 사두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존재는 남았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잃어버린 과거를 불러올 수 있는 현재의 흔적 앞에서 허탈함과 무기력함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수령 150여년 팽나무 보호수의 호위를 받으며 영암읍성 언덕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열무정 사정이 외롭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자료가 발굴돼 속 시원하게 감춰둔 역사를 드러낼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 열무정 최대의 유산 ‘사포계’…활쏘기 지원 위한 재정조직
열무정 사정과 달리 영암 열무정의 큰 자랑거리이자 유산인 사포계(社布契) 자료는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사포계는 열무정을 존재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자 근원이라고 할 만큼 열무정과는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사포계가 존재했기에 열무정이 존재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열무정사포계 사무실 입구. <사진=한정곤 기자>

사포계는 사정을 유지하고 사원들을 지원하기 위한 재정조직이다. 열무정 사원들이 구성원이지만 일반인들도 참여가 가능하다.

열무정 사정과 함께 전라남도문화재 제160호로 지정된 사포계 문서는 24책이 전해져 온다. 이 가운데 1797년(정조21년) 5월 『사포계지』에서 결성시기가 확인된다.

“영암은 멀리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연변(沿邊)의 보장(保障) 역할을 하는 곳으로 옛날 사람들이 향사(鄕射)의 모임을 결성한 뜻을 본받아 이 고장에서도 사포계를 조직한다”면서 “관(官)에서 20관(貫)을 보조해 주어 차차 무예를 익힐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를 태만하거나 소홀함이 없도록 사습(射習)에 더욱 전진하여 마땅히 시행해야 할 일이다.”

또한 『사포계 완의(完議)』에는 “풍년을 맞이해 관(官)의 처분(處分)에 따라 문득 사예(射藝)의 강습을 받으라는 지시가 내려 왔다”면서 “활쏘기를 권하는 지령이 날마다 지엄해 그 기예를 다투는 쟁예(爭藝)의 장(場)인 사포(射布)를 통해 청운(靑雲)의 길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활쏘기를 권장하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

1370년대 전후로 남해안에는 왜구들의 노략질이 잦았고, 이 때문에 광주 송정리에 있던 육군 총사령부격인 ‘병영성’이 1417년 강진으로 옮겨와 축성될 만큼 피해가 계속돼 남쪽을 방어하는 보장처(保障處) 역할을 했던 영암지역에서 활쏘기가 권장됐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조직으로 1797년 사포계가 결성됐던 것이다.

결성 당시 계원들은 120여명 규모였으며 각자 5전씩 각출해 계 운영자금을 보충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 사포계의 자산은 7~8억원에 달한다. 한때 150여명에 이르렀던 계원들은 고령으로 인한 사망자가 늘면서 현재는 절반 수준인 70여명으로 줄었다. 이 가운데 열무정 사원은 50여명이며, 20여명은 일반인 계원들이다. 사원은 접장부터 계원 자격을 갖는다.

사포계에서는 대회 출전 선수들의 지원금과 격려금 등으로 열무정에 매년 600만원에서 700만원 정도의 지원을 하고 있다.

   
▲ 1982년부터 이름과 재임시간이 적혀있는 열무정 역대 사두들의 사진과 각종 대회 우승기. <사진=한정곤 기자>

현재 열무정에는 여무사 6명을 포함해 43명의 사원이 등록돼 있다. 군 단위 활터로서는 평균 이상의 인원이다. 게다가 2016년 4명, 2017년 3명, 올해 2명 등 입사자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재정도 비교적 탄탄하다고 배원식 사두는 전한다. 사포계의 지원 탓도 있겠지만 배원식 사두 이후 불필요한 비용을 줄여 사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암군의 지원을 이끌어낸 것도 한 몫을 단단히 한다.

배원식 사두는 “제가 사두로 취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매달 50만원의 비용으로 고전을 운영했지만 운동 삼아 연전길을 권장해 연간 600만원을 절약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영암군에서 고용장려 차원에서 노인과 장애인을 고전으로 고용하면 보수를 지원하겠다는 제안도 했지만 배 사두는 거절했다. 그 예산을 필요한 다른 지원으로 요청해 받고 있단다.

특이한 점이라면 활터 안에 열무정 노인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65세 이상 사원 13명이 가입해 있다. 이곳을 통해 영암군은 쌀을 비롯해 목욕·이발비까지 매달 지원을 받고 있다.

“읍성 활터보다 살이 날아가는 멋은 덜하지만 3년 동안 세 번씩이나 집 없이 쫓겨 다녔던 떠돌이 생활에 비하겠습니까.”

영암을 빠져나오면서 열무정의 한 젊은 접장이 했던 말이 자동차 꼬리를 따라왔다. 민원에 밀리고 개발에 밀려 방랑하는 활터의 현실을 접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허탈감 탓이 아닐까.

올해 초 서울 살곶이정 재개정 행사에서 보았던 그곳 사원들의 감격해 하던 모습과 폐허 같았던 순천 죽도봉 환선정에서 느껴야 했던 가위눌림 같은 뭔가 답답함이 하나로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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