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燕巖) 박지원①…홍대용과의 도의지교(道義之交)와 북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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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 박지원①…홍대용과의 도의지교(道義之交)와 북학파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5.03.26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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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㉚
▲ 북학파의 비조인 연암 박지원(왼쪽)과 홍대용의 초상.

[한정주=역사평론가]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과 지식혁명을 이끈 세력은 두 개의 재야 지식인 그룹이었다. 그 하나가 성호 이익에게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학문을 배우고 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 그룹을 일컫는 성호학파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연암(燕巖) 박지원과 담헌(湛軒) 홍대용을 비조로 하여 사제(師弟) 혹은 사우(師友) 관계를 형성한 북학파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17세기 이후 급속하게 교조화·권력화된 성리학의 폐쇄주의와 보수주의에 맞서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진보적인 학문과 실용적이고 실증적인 지식을 추구했다.

특히 북학파는 자신들이 추구했던 신학문과 지식 경향을 가리켜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경세제민학(經世濟民學)·경세제국학(經世濟國學)·명물도수학(名物度數學)’이라고 불렀다.

‘이용후생학’이란 나라 경제와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는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 및 생활 도구나 생산 기구의 제작 등을 다루는 학문으로 과학기술이나 농업·공업기술 등이 여기에 해당하고, ‘경세치용학·경세제민학·경세제국학’은 세상을 경영하고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정치학,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혹은 사회복지학 등을 꼽을 수 있다.

또한 ‘명물도수학’은 세상 만물을 고증·변증하거나 그 법칙을 분석하고 수량(數量)과 도량(度量)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산학(算學: 수학), 물리학, 기하학, 천문지리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 일체를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 북학파를 실질적으로 창시하고 이끌었던 박지원과 홍대용의 호에 얽힌 이야기를 추적해 그들의 삶과 철학의 자취를 밝혀보려고 한다.

그런데 ‘북학파’란 용어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 용어는 박지원의 제자였던 박제가가 1778년(정조 2년) 청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저술한 『북학의(北學議)』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이 책에서 박제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풍속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시행하여 일상생활에 유용할 만한 것은 붓을 들어 글로 남겨두었다. 더불어 그렇게 했을 경우 얻을 수 있는 이로움과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일어나게 되는 폐단을 첨부하여 학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맹자(孟子)』에 등장하는 진량(陳良)의 말을 취해 책의 이름을 『북학의』라고 붙였다.” 『북학의』‘자서(自序)’

진량의 말이란 『맹자』의 ‘등문공상(滕文公上)’ 편에 나오는 “陳良 楚産也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진량 초산야 열주공중니지도 북학어중국)”, 즉 “진량은 초나라 출신이다. 주공과 중니(공자)의 도를 좋아하여 북쪽의 중국으로 가서 공부하였다”라는 내용을 가리킨다.

박제가는 춘추전국시대 남쪽 초나라 출신의 진량이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노나라를 찾아가 선진 학문인 유학을 배웠던 역사적 사실에 비유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위해 조선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배워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대부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킬 목적으로 ‘북학’이라는 용어를 차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북학파의 역사는 박제가가 ‘북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1778년보다 훨씬 이전, 즉 박지원과 홍대용이 사변적이고 보수적인 성리학의 굴레와 족쇄에서 벗어나 새로운 학문과 실용적인 지식을 추구하기로 ‘도의지교’를 맺은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박지원과 홍대용이 처음 만난 때는 1755년(영조 31년) 무렵이다. 박지원은 한양 근교 양주군 석실리(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1동 서원마을)에 있던 석실서원을 찾아가 홍대용의 스승인 미호(渼湖) 김원행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이때 홍대용을 만나 사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박지원은 19세였고 그보다 6살 연상인 홍대용은 25세였다. 따라서 북학파의 역사는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북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때보다 빠르면 23년이나 앞서 시작된 셈이다.

이러한 북학파의 면모와 주요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의 평생 언행(言行)을 모아 기록해놓은 『과정록(過庭錄)』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다.

“선군(先君 : 아버지)께서는 타고난 성품과 자질이 호탕하고 고매(高邁)하였다. 그래서 명예나 이익에 행여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나 않을까 항상 경계하고 삼가셨다. 중년에 과거시험장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자 교유(交遊)하는 사람들 또한 간소해졌다. 오직 담헌 홍대용과 석치 정철조와 강산 이서구가 수시로 서로 오고 갔고, 이덕무와 박제가와 유득공이 항상 따라서 어울렸다.

담헌 홍대용은 아버지보다 여섯 살 많았는데 학식이 정밀하고 심오했다. 담헌공 역시 아버지처럼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그만둔 채 한가롭게 지내셨다. 담헌공은 아버지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제를 맺었는데, 두 분은 서로를 가장 친하고 독실한 벗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분은 서로 공경하여 말하거나 부를 때 마치 처음 교제를 맺었을 때와 같이 했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이 대부분 이용(利用)과 후생(厚生), 경제(經濟)와 명물(名物) 등의 학문을 소홀하게 여긴 탓에 그릇된 지식을 답습하는 일이 많아 그 학문이 매우 거칠고 우둔하다는 것을 병통으로 생각하였다. 담헌공이 평소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던 의견 또한 이와 같았다.

이에 두 분은 서로 만날 때마다 며칠을 함께 머무르며 위로는 고금(古今)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연고(緣故)에서부터 옛사람의 출처(出處)와 절의(節義), 제도의 연혁(沿革), 농업과 공업의 이로움과 병통, 재산과 재물을 관리하는 방법과 더불어 지리, 국방, 천문, 음악, 법률뿐만 아니라 나아가 초목이나 조수(鳥獸), 육서(六書 : 상형(象形)ㆍ지사(指事)ㆍ회의(會意)ㆍ형성(形聲)ㆍ전주(轉注)ㆍ가차(假借) 등의 문자학)와 산학(算學)에 이르기까지 구멍을 꿰뚫어 동여매거나 논의(論議)를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모두 기록하거나 외울 만 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북학파의 주요 멤버가 박지원,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731년생인 홍대용과 1730년생인 정철조는 스승 김원행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 사이였다. 그들은 1737년생으로 자신들보다 예닐곱 살이나 연하인 박지원과는 평생 동지이자 친구로 만났다.

또한 1741년생인 이덕무와 1748년생인 유득공, 1750년생인 박제가와 1754년생인 이서구는 사상적으로는 북학에 뜻을 함께 한 동지였고 문학적으로는 백탑시사(白塔詩社)를 맺어 함께 활동한 시동인(詩同人)이었다.

이들은 신분과 나이를 떠나 모두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때 홍대용은 이들 그룹의 고문이자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다.

그런데 박지원와 홍대용의 글과 기록을 뒤지다 보면 흥미롭게도 그들이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을 단순히 제자 혹은 후학으로 여겼다기보다는 사상적 동지이자 학문적 벗으로 교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관계는 ‘우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게 더 타당할 만큼 이들은 나이와 경륜 그리고 신분의 귀천(貴賤)과 벼슬의 고하(高下)를 떠나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박지원,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가 당시 권세를 누린 노론 명문가의 자제였던 반면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는 사회적 냉대와 멸시를 감내해야 했던 서얼 출신이지 않는가?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당시 북학파 사람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진보적 사고를 갖고 행동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세상의 모든 사물은 다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만물평등사상을 바탕으로 젊은 시절에 일찍이 기득권을 내팽개치고 오로지 이용후생과 경세제국과 명물도수의 학문과 그 실천에 평생을 바쳤던 박지원과 홍대용의 삶과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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