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西溪) 박세당① ‘수락산의 나뭇꾼’ 자처한 또 다른 기사(奇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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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西溪) 박세당① ‘수락산의 나뭇꾼’ 자처한 또 다른 기사(奇士)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9.0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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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⑭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의 서계 박세당 사랑채. 동쪽의 수락산을 배경으로 한 서향집이다. 원내는 서계 박세당의 영정.

[한정주=역사평론가] 김시습이 수락산을 떠난 후 이 산의 명성은 다시 삼각산(三角山)과 도봉산(道峯山)에 가려져 빛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7세기 중반 또 한 명의 기사(奇士)가 수락산을 찾아오면서 이 산은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조선을 지배한 유일한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유학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밝힌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낙인이 찍혀 능욕을 당한 후 죽음을 맞은 ‘조선 철학사의 이단자(異端子)’ 박세당(朴世堂)이다.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종점인 의정부 장암역에서 내려 수락산 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다보면 자그마한 개울을 끼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 나타난다. 수락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이 개울이 바로 박세당이 호(號)로 삼은 ‘서계(西溪)’이고 아담한 마을은 그가 석천동(石泉洞)으로 이름을 바꾼 장자곡(長者谷) 혹은 장자동(長者洞)이다.

박세당은 1668년(현종 9) 40세 무렵 수락산에 들어가 은거할 결심을 하고 스스로 ‘서계의 나무꾼’이라는 뜻으로 ‘서계초수(西溪樵叟)’라는 호를 사용했다. 이때 옥당(玉堂 : 홍문관)의 교리로 재직하던 박세당은 일부러 문신월과(文臣月課)에 세 번이나 제술(製述)하지 않아 파직을 자처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락산 석천동으로 들어왔다. 박세당이 수락산에 들어올 당시의 세태와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연보(年譜)’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대개 이때 회천(懷川 : 송시열)이 향리에 물러나 거처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워 조정의 논의를 결정했다. 당시 요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앞다투어 그의 의견을 따랐고, 일세(一世)의 인물에 대한 진퇴(進退) 여탈을 오로지 그의 의향을 보고 행하였다. 단 한 마디 말이라도 조금만 거스르면 마치 연못에 떨어뜨리는 듯 하고, 뜻이 다 잘 맞으면 마치 무릎 위에 올려놓을 것처럼 했다.

선생(박세당)만 홀로 이치에 바른 말을 하고 곧은 도리를 지켜 그에게 굽신거리지도 않고, 그를 우러러 보지도 않고, 그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지위와 명망과 재주와 학식을 또한 쉽게 배척하거나 버릴 수도 없었으므로, 이에 흘겨보며 시기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서필원(徐必遠), 김시진(金始振), 김석주(金錫胄)의 일로 말미암아 선생까지 함께 비방을 받자 선생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단지 녹봉(祿俸)만 받으려고 벼슬할 마음도 역시 없어서 마침내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며 그를 따라 주장을 거두느니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아 밭이랑 사이에 몸을 마치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다.” 『서계집(西溪集)』, ‘연보(年譜)’

 

▲ 박세당의 문집인 『서계집』.

박세당은 선비의 몸이지만 직접 농사짓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농사철에는 농부나 야인(野人)들과 함께 어울려 하루 종일 밭에서 지내곤 했다. 더욱이 박세당은 자신의 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색경(穡經)』이라는 서책까지 저술했다.

특히 『색경(穡經)』은 유학자(儒學者)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농업에 종사하고 또한 농업기술 등 실용적인 지식을 익히는데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살아있는 사례로 18세기에 만개했던 ‘실학(實學) 운동’의 선지자적 역할을 한 서책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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