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산 아래 양지바른 노천 활터…화순 서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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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산 아래 양지바른 노천 활터…화순 서양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10.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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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⑱ 600여년 역사 화재로 소실…지역축제 애물단지로 전락
화순 남산공원 정상의 서양정 전경. [화순군청 제공]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산이 아니다. 중머리재 위로 천왕봉이 우뚝 솟은 우람한 형세는 온데간데 없고 멀리 고개를 내민 천왕봉 양쪽으로 날개를 펼친 듯 첩첩이 겹쳐지는 산줄기가 긴 꼬리를 늘어뜨린다. 천왕봉 아래 자리 잡은 규봉, 장불재, 서석대 등의 장관은 산줄기에 겹쳐지거나 너무 멀어 육안으로는 다가가지 못한다. 지공대사가 법력으로 수많은 돌을 깔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생채기처럼 맨살을 드러낸 너덜겅도 가리었다. 무등산의 3분의 1이 화순군에 걸쳐있다는 설익은 귀동냥만으로 화순 읍내에서 온전한 무등산을 조망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부터가 부질없는 짓이다.

사실 화순에서 무등산을 보려면 이서면으로 가야 한다. 특히 신들이 옥을 깎아 놓은 듯 가장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그래서 이곳을 보지 않고 무등산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던 규봉 역시 이서면에서야 조망이 가능하다. 고려 19대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1150~1204년경)의 시에서 규봉의 선경(仙境)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詭狀苦難名 괴상한 모양 무엇이라 이름하기 어려운데
登臨萬象平 올라와 보니 세상이 눈 아래 있네
石形裁錦出 돌 모양 비단을 잘라 만든 것 같고
峯勢琢圭成 산 형세는 옥을 깎아 이룬 것 같네
勝踐屛塵迹 좋은 곳에 오니 세상 티끌 끊었고
幽서添道情 그윽이 사니 도정이 더하네
何當抛世綱 어찌하여 세상일 다 버리고
趺坐學無生 여기 부좌하여 무생불법을 배울꺼나

규봉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 장군이 문바위에서 화순 동면 청궁마을 살바위까지 화살을 쏘고 백마가 먼저 도착하는지를 시험했다가 백마가 늦었다며 백마의 목을 치니 그제서야 화살이 날아와 바위에 꽂혔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광주를 대표하는 번화가인 충장로는 1788년 정조가 사당을 건립하고 배향하며 내린 그의 시호(諡號) 충장공(忠壯公)에서 유래한다.

서양정 사정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 향사당으로 이어온 활쏘기
광주광역시의 동남쪽 경계를 이루는 너릿재터널를 통과하자 곧바로 화순 읍내로 들어선다. 옛부터 산악과 계곡이 경관을 이루고 갖가지 천어(川魚)의 보고로 명경(明鏡)같이 맑은 강물과 그 유역으로 기름진 전답이 널린 온후순박한 고장이다. 그러나 이상을 펼치다 유배된 조광조와 적벽의 절경에 반한 방랑시인 김삿갓이 죽음을 맞이한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가지 한가운데에는 아담한 토산인 남산이 봉긋하다. 해발 40여 미터 높이에 불과한 완만한 경사길을 따라 오를 수 있어 지역민들이 자주 찾는 근린공원이다. 특히 매년 10월 중순에서 11월 초 1억 송이가 넘는 국화꽃이 뒤덮인 남산공원 일대에서는 지역축제 국화향연이 개최돼 전국에서 6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든다. 축제를 앞둔 남산공원 오르막 길가에는 국화 개화를 위해 가로등의 야간조명을 한시적으로 소등한다고 알리는 현수막이 이채롭다. 남산공원 정상에서 서양정(瑞陽亭)을 만난다.

서양정의 역사는 1436년(세종 1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비록 기록물 없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현존하는 활터로는 1408년(태종 8년) 창건된 고흥 봉황정에 이어 두 번째 오랜 역사다.

지금은 옹벽으로 바뀐 서양정 옛 입구에 세워진 서양정 연혁비에는 창건 이후 향사당(鄕射堂)으로 맥을 이어온 과정이 담겨있다. 군자정(君子亭)으로 한 차례 이름이 바뀌었고 오랜 기간 정자를 갖추지 못했던 노천(露天) 활터로 기록돼 있다.

2009년 4월 사대 공사 이전에 촬영된 서양정 사정.

“본 정은 우리 민족의 전통 무예를 연마하는 이 고장 유일의 심신수련 도장으로 서석산(무등산)의 정기받은 만연산 하록의 양지바른 곳 화순의 고호(古號)를 따 서양정이 창설된 세종 18년(서기 1436년) 이래 유구한 역사를 통해 세파를 겪으면서 만연산 여록인 아후평(衙後坪) 사대를 남산 하의 연지변으로 이전하고 정명(亭名)을 군자정으로 개호해 노천 습사로 면면히 맥을 이어 사이관덕(射以觀德)의 미풍양속을 함양하던 중 서기 1964년 9월 5일 이곳에 가정(假亭)을 건립해 서양정으로 환원했다. 이 고장 국궁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어 활발한 습사와 연마로 우수 무사의 배출과 군민체위향상에 기여한 바 있지만 규모와 시설을 겸비한 사정의 건립이 요청돼 지방 유지와 사우들의 열의로 뜻을 모아 서기 1974년 3월 1일 본 정 신축을 추진하고 착공해 동년 10월 26일 준공했으며 오늘에 이르러 명실공히 이모(而貌)를 갖춘 도장으로 발전했음을 동경함이로다.”

◇ 점화장 발화 화재로 사정 전소
간략하게 서술한 연혁비의 내용을 보태면 서양정은 당초 만연산 인근 아후평에서 창건됐다. 조선 시대 때는 향사당·향청으로 불리며 향청리 55번지에 있었지만 현재 상광덕마을 광덕1리 화순 관아 뒤 관덕정 자리였던 남산 방죽(현 읍사무소 자리)으로 옮겨 김판옥 씨 집 자리에 사대를 설치하고 건너편 과녁을 향해 활쏘기를 했다.

연방죽이라고도 불렸던 남산 방죽은 여름이면 분홍빛 연꽃이 만발해 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명소로 전해진다. 연못에는 붕어가 많아 큰 느티나무 아래 낚시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이 즐비했 겨울에는 방죽이 꽁꽁 얼면서 얼음을 지치려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당시 연못 가운데에는 작은 동산이 있었고 관풍정이란 정자를 세워 사정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과 화순읍지에 남아있다.

사대 끝 난간에서 바라본 무겁. [사진=한정곤 기자]

1961년에는 삼천리 유우열 씨 집앞 천변으로 옮겨 임시 사장으로 사용했지만 홍수로 유실돼 남산 현 충혼탑 앞에서 노천습사로 활쏘기의 맥을 이었다. 이후 농촌지도소(현 군민회관 자리)를 신축하자 약간 왼쪽으로 옮겨 장남구 씨 밭을 활터로 이용했다.

1964년 5월에는 사정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해 9월 준공했으며 1974년 결성된 중수추진위원회를 통해 10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재실의 팔작지붕 건물로 준공했다.

그러나 1994년 3월 점화장에서 발화한 화재로 사정이 전소돼 1996년 국비 1억원과 군비가 투입돼 현재의 건물로 복원됐다. 복원된 정자 역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평기와 건물 형태지만 지붕만 전통한옥 양식일 뿐 사실상 콘크리크 건축물이다. 2012년에는 사대 앞을 허물어 현재의 식당 건물까지 신축했다. 삭막한 콘크리트 식당 옥상으로 변해 버린 사대 앞은 잔디가 깔렸던 활터 정자의 멋스러운 운치마저 허물어버렸다. 600여년에 이르는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고풍스런 분위기는 겉모습만으로는 서양정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사무실, 휴게실, 궁방 등으로 칸막이 없이 사용하고 있는 내부도 마찬가지다. 1994년 화재로 그동안 전해오던 각종 유물이 모두 소실돼 기록물 없는 구전 활터로 전락했다. 그나마 서양정의 역사가 기록된 <서양정(瑞陽亭記)> 내용은 훗날 표구된 액자 형태로 복원돼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액자로 복원해 보관하고 있는 <서양정기>. [사진=한정곤 기자]

“무릇 본 군의 건치와 연혁을 볼진대 백제조에는 임리아(仍利阿)라 칭하고 신라조에는 여미(汝湄)로 고쳤고 일운(一云)·여빈(汝濱)이라 했으며 고려조에는 화순으로 고치고 본조에는 여러 차례 개혁해 문이 번거롭고 기록하기 어려우니 대개 본 읍은 서석산 기슭에 기조(起祖)해 나한산(羅漢山)에 이르러 그쳤고 미맥이 높이 일어나 언덕을 이뤘으니 오늘날 남산(南山)이라 칭하고 옛적에는 산산(蒜山)이라 칭하고 일명은 화산(花山)이라 했으니 옛사람이 형(形)을 취해 이름을 칭함인가.

이는 산등을 좌로 하고 서석을 짊어졌으며 다시 삼천(三川)을 띠여 오성(烏城)은 동쪽에 웅거하고 불선치(佛仙峙)는 남쪽에 있으며 종괘(鍾掛)는 서쪽에 있고 나한(羅漢)은 북쪽에 있으며 성숙(星宿)은 진(軫)에 있어 성곽이 완고하고 토질이 비옥하니 백성은 태평해 하늘이 영구(靈區)를 주셨음에 일향(一鄕)의 다사(多士)들은 문학을 배우고 무예를 익혔으니 이를 제외하고 둘도 없는 곳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러 막연히 사(射)를 익힐 정자가 없어 무(武)를 연습한 다사(多士)들이 풍우(風雨)를 피할 수 없음이 천추(千秋)에 유한이었고 또한 겸해 사문(斯文)은 뜻이 있어도 이루지 못하고 뜻이 없어서 나아가지 못해 빈터로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러나 궁술(弓術)의 전래(傳來)가 오래됐으니 어찌 허탄하리오. 하우씨(夏禹氏)의 손자 태강(太康)의 조정에 유궁후예씨(有窮后羿氏)는 정신(精神)이 일도(一到)하면 금석(金石)을 가투(可透)하는 설(說)이 있었고 손빈(孫賓)은 궁노마릉(弓弩馬陵)을 써서 위나라 군사를 크게 일으켰고 공자(孔子)는 주나라 무고에 들어가 문인에게 가르치면서 이는 숙신씨(肅愼氏)의 활이라 하였는데 오직 우리 동방을 동이(東夷)의 나라라 칭하였으니 궁(弓)으로 칭하는 뜻인데 이(夷)란 것은 대궁(大弓)이라 숙신(肅愼)은 단군(檀君)의 속국이요 부여의 요족(瑤族)이라.

장준호(82세) 고문(왼쪽)과 노고길 접장이 이른 아침 습사하고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동국(東國)의 궁술(弓術)이 이같이 소명(昭明)하거늘 오직 우리 화순은 위에 기록한 바와 같이 중원(中元) 무신년간(戊申年間)으로부터 의연모금으로 겨우 두어칸을 얽었음을 규모가 협착해 습사(習士)들이 몸을 용납할 수 없음으로 현 갑인춘하(甲寅春夏)에 이 정자를 중수할 제 화란(畵欄)과 주각(朱閣)을 불일간에 이루었으니 현 군수와 유지 다사(多士)들의 진심진력(盡心盡力)함이 아니겠느냐.

또한 궁술(弓術)은 주(周)나라 조정에서 예(禮)를 짓고 풍악을 지음으로부터 사법(射法)으로서 덕을 세우고 공을 이루는 도를 삼아 부부(夫婦) 군신(君臣) 부자(父子)의 기강을 바로 밝히고 상하(上下) 상벌(相伐)한 폭화(暴禍)의 단서(端緖)를 엄금하니 사도(斯道)는 큼이로다.

정(亭)을 서양(瑞陽)으로 이름한 것은 본 군의 간명(間名)이 일운(一云)·오성(烏城)·산양(山陽)·서양(瑞陽)이니 원래는 서석산(瑞石山)의 뜻을 취함인가. 일후(日後)에 오직 우리 다사(多士)들은 한결같이 예기(禮記)에 대사의(大射義)의 법을 따라 연마하여 공(工)을 짓고 쾌활히 힘을 얻어 기운이 상쾌하고 마음이 맑아서 문득 연년(延年)을 얻을 것이요 국민의 보건상 특수한 일기(一技)라 이룬 것이 또한 마땅치 아니하리야.” (호남기록문화유산 번역문)

◇ 화순의 옛 이름…사라진 남용 김용구 현판
1974년 9월 1일 작성된 중수기(重修記)로 화순의 유래와 지형적 특징을 시작으로 정자 없이 노천에서 활쏘기를 했던 서러움이 읽혀진다. 이어 중국 여러 나라의 고사를 통해 활쏘기의 의미를 되짚고 이를 계승하고자 한다는 내용과 함께 서양정이라는 정명(亭名)의 유래까지 언급하고 있다.

끝부분에는 ‘연일(延日) 정연승(鄭然承) 삼가 지음’이라고 글쓴이가 기록돼 있지만 화순의 한학자였다는 것 외에 생몰(生沒) 연대는 물론 서양정 사원이었는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이름 앞의 ‘연일’이 본관을 뜻하는지 호(號)를 뜻하는지, 아니면 본관을 호로 사용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두 차례 사두를 역임한 우송 서동근이 쓴 서양정 현판. [사진=한정곤 기자]

<서양정기>에서도 밝혔듯 서양정의 정명(亭名)은 화순의 옛 이름인 ‘서양(瑞陽)’에서 유래한다. 무등산의 또 다른 이름인 서석산(瑞石山)의 ‘서(瑞)’와 화순의 옛 이름인 산양(山陽)에서 ‘양(陽)’을 취했다는 해석도 있다. 주진택 사범은 “서석산 아래 양지바른 곳”이라고 풀이한다.

제작 시기 없이 ‘愚松(우송)’이라고만 적힌 현판은 지역 서예가 서동근(徐東根)의 글씨다. 서양정 사원으로 1989~1990년과 2005~2006년 두 차례 사두를 역임했다. 전라남도미술대전에서 입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지역 서예가 모임인 묵지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사대 앞 정심정기(正心正己) 표지석 등 현재 서양정 곳곳에 그의 유묵이 남아있다. 또한 액자로 복권된 <서양정기>도 그의 글씨다. 사두 재임 시절에는 신사(新射)들의 초몰기 기념 선물로 서예작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2005년 집궁한 주진택 사범도 초몰기 후 받은 서예작품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현판과 <서양정기> 글씨를 썼던 시기는 1996년 화재로 소실된 사정을 복원한 이후로 추정된다. 그는 지난 2007년 작고했다.

우송 현판 이전에는 순창 육일정 현판을 쓴 남용(南龍) 김용구(金容九)의 현판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지만 남아있는 사진도 없고 서양정 사원 중에 이를 기억하는 이도 없다. 광주에서 태어난 김용구는 일본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온 건축가이자 서예가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도소학을 공부하고 의재 허백련의 영향으로 예술에 심취해 일가를 이뤘다. 1958~1960년 세 차례 국전에 입선했으며 1963년 광주에 전국 최초의 서예원인 남용서도원을 개원해 생을 마감할 때까지 후진양성에 진력했다. 광주광역시 문화재 제5호인 무등산의 의재 허백련 문화유적인 춘설헌(春雪軒)이 그의 설계로 1956년 건축됐다. 남아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구례 화엄사 대웅전·각황사·원통전 주련, 순천 송광사 박물관 현판, 국립공원 지리산입구 자연석 판서(版書), 용인 한국민속촌 정문·박물관·동헌 현판, 제주 관음사 현판, 광주시립박물관·민속관 현판, 상무대 정문 현판, 육군제3사관학교 간판, 광주일보신문 제자(題字) 등이 있다.

무겁에서 본 서양정 사정. [사진=한정곤 기자]

◇ 국화축제의 애물단지 전락…이전 논의 진행중
무겁에서 바라본 서양정 사정(射亭)은 서당산, 만연산, 안양산, 오성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그 뒤로 무등산이 서양정을 내려다본다. 회색빛 큰크리트 건물과 주차된 자동차만 제거하면 거대한 느티나무가 한옥 팔작지붕에 그늘을 살짝 드리운 풍광으로 한 폭의 그림을 떠올릴 만하기에 충분하다.

반면 사대는 답답하다. 정남향 과녁 위로 멀리 황새봉이 뒤를 받치는 시원하게 뚫린 조망과 달리 1985년 건립된 군민회관 건물이 오른쪽에 거대한 벽을 쌓아 시야를 가린다. 사대 앞 콘크리트 난간은 걸리적거리고 그 아래 자동차와 산책하는 이들의 움직임과 소음도 거슬린다. 국화가 만개하기 시작하면 남산을 찾는 관람객들은 시도 때도 없이 활터 주변을 활보한단다.

특히 지난 2013년부터 시작된 국화향연은 서양정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서양정 사원에게는 물론 화순군민에게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애물단지가 되고 있다. 축제를 전후로 두 달 동안 서양정은 휴정(休亭)에 들어가지만 일부 군민들은 아예 이전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남산공원을 쾌적한 주민쉼터로 정비하고 군민들이 자랑거리로 말할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 여기에 “남산 정상은 옛 일본의 신사가 있던 자리”라며 “매년 국화향연으로 대표 유명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서양정 건물은 옥의 티 같은 일제 잔존물”이라는 지역언론의 다소 황당한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사대에서 바라본 무겁. [사진=한정곤 기자]

서양정 조영기 사두는 “남산 정상에 신사가 있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면서 “설사 신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된 우리의 전통 활쏘기는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그 어떤 기념물보다 이곳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로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고 일축한다.

다만 국화향연을 비롯해 남산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제기되는 군민들의 이전 민원은 서양정의 고민거리다. 또한 국화향연 전후로 휴정해야 하는 두 달 동안 사원들의 피해도 심각하다. 현재 서양정과 화순군궁도협회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가 구성돼 군청과 이전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다. 정순채 협회장은 “현재 활터는 옛부터 화순의 활쏘기 맥을 이어온 자리로 선배 활잡이들이 물려준 곳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 구사(舊射)들을 중심으로 확고하다”고 강조한다. 조영기 사두는 “군민이 원하면 이전은 불가피하겠지만 사원들이 원하는 장소로 이전이 보장돼야 한다는 조건이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1억 송이가 넘는 국화꽃으로 뒤덮인 남산공원. 가운데 위쪽이 서양정이다. [화순군청 제공]

현재 이전부지로 서양정 서남쪽 하니움문화스포츠센터 인근의 화순천변이 거론되고 있지만 예산 확보 문제로 현실화 가능성은 높지 않다. 광주광역시에서 터널 하나만 통과하면 닿는 화순의 땅값이 광주광역시 수준까지 치솟아 부지 마련를 위한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사실상 이전 문제는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서양정 부지는 군청 소유다. 사원 4명 명의로 소유하고 있던 무겁 부지를 지난 2007년 기부채납했다. 훗날 다시 서양정을 찾게 되는 날 국화꽃이 대신할 무겁과 불과 25년밖에 되지 않은, 보존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사정 자리에서 600여년 역사의 활터 흔적만 마주하게 되지 않을지 벌써부터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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