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목사 고을의 활터…나주 인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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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목사 고을의 활터…나주 인덕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21.10.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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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⑲ 지난한 이정·폐정 되풀이…방치 편액 번역 시급
나주읍성의 동문인 동점문. 북쪽 옛 5일 장터 자리에서 인덕정이 창건됐다. [사진=한정곤 기자]

가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고개를 처박은 들녘 끝에 영산강이 흐른다. 나주대교를 건너 시가지로 들어서자 천년고도의 흔적들이 곳곳에 널렸다. 고려 말 친명(親明) 정책을 주장하다 나주 회진현(현 다시면 일대)으로 귀양을 갈 때 정도전이 지났다는 동점문(東漸門)이 먼저 반긴다. 약 3.7㎞ 둘레의 나주읍성 동문으로 지난 2006년 복원됐다.

정확한 축조연대가 확인되지 않는 나주읍성은 『고려사』 ‘김경손 열전’에 처음 등장한다. 고종 24년(1237년) 이정년 형제가 백적도원수라 칭하고 담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광주 등지의 고을을 접수한 뒤 나주성을 포위하고 전투를 했다는 내용이다.

나주읍성에는 동점문을 비롯해 서문인 영금문(暎錦門), 남문인 남고문(南顧門), 북문인 북망문(北望門)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훼철되기 시작해 1912년 동점문이 붕괴되고 1916년 도로 공사 등으로 남고문을 제외한 영금문·북망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어 1920년 제작된 ‘속수나주지((續修羅州誌))’에서는 남고문에 대한 기록마저 자취를 감췄다. 이들 사대문은 1993년 남고문을 시작으로 현재는 모두 복원됐다.

정도전이 유배길에 동점문에 올라 나주 원로들에게 읊었다는 ‘등나주동루유부로서(登羅州東樓諭老書)’에는 “산천이 아름답고 인물이 부서(富庶:재물이 많고 넉넉하다는 뜻)하며 남방의 일대 거진(巨鎭:중간규모의 군사진영)”이라고 나주를 소개한다.

실제 나주는 중심부에 우뚝 솟은 진산 금성산 아래 영산강이 펼쳐지고 그 유역으로 나주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이 풍부하며 평탄한 구릉이 서로 연결된 전형적인 곡창지대다. 삼국시대부터 농업이 발달해 어느 지역보다 풍요로운 고장이었으며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전주와 함께 교통·군사·행정의 거점 역할을 했던 전라도의 중심 도시였다.

특히 고려가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계를 마련하고 국가 기반을 확립한 983년(성종 2년)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했던 전국 12목(牧)의 하나로 1895년 나주관찰부가 설치될 때까지 천년고도 목사고을을 유지했다. 또한 1018년(현종 9년)에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머리글자를 따 전라도(全羅道)라는 지명을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지금과는 다른 나주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활터도 지금은 인덕정(仁德亭) 한 곳뿐이지만 1872년 제작된 지방지도에는 사정(射亭) 두 곳이 뚜렷하게 표기돼 있다.

1872년 지방지도와 나주읍성 부분도. 검정색 원 두 곳에 사정(射亭)이 표기돼 있다. [자료=서울대 규장각]

◇ 고풍스러운 옛 정취 지워진 사정
동점문에서 나주천을 건너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인 나주역사(羅州驛舍) 쪽으로 내려가다 다시 남고문 방향으로 꺾어 남산길을 따라 인덕정으로 오른다.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 사정 뒤로 표지석과 연혁비가 장승처럼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원래 자리가 아닌 탓에 입구가 정자 앞쪽이 아니라 뒤쪽이다. 붉은 벽돌을 두른 사정 건물은 이정(移亭)의 아픔을 전하듯 고풍스러운 옛 정취보다는 사람의 손을 많이 탄 듯 현대식 건축양식이 덧대어 있다. 그 앞으로 잇댄 두 동의 콘크리트 건축물은 사무실·궁방 등으로 사용하는 건물과 사대 건물이다. 이들 건물로 무겁에서 사정을 바라보면 답답함에 가슴이 턱 막힌다. 나주중학교 교사(校舍)부터 잿빛 콘크리트 건물이 무질서하게 키재기를 하고 있는 풍경이 볼썽사납다.

그러나 사대에서는 좌우가 막힘없이 시원하게 뚫린 개활지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무겁까지의 조망도 거리낌이 없다. 누군가는 집중력을 방해한다 하고 또 누군가는 바람을 읽기 힘들다고 엄살을 부린다. 주민 몇몇이 김을 매고 있는 밭과 주렁주렁 가을이 익어가는 감나무 과수원 사이를 오솔길로 지나는 연전길은 인덕정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멋이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오래 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잡목들까지 인위적으로 조성한 듯한 억지스러움 없이 자연스럽다. 무겁 뒤로 빼죽 고개를 내민 흉물스러운 아파트가 이맛살을 찌뿌리게 하지만 그나마 우람한 덩치의 수목들이 줄지어 장벽을 친다. 불과 6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자연이 함께 하고 주민이 공생하는, 어쩌면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더 이상 볼 수 없는 옛 활터의 마지막 원형이 아닐까.

남산시민공원 내 인덕정 입구 전경. 왼쪽에 연혁비가 보인다. [사진=한정곤 기자]

인덕정은 임진왜란 발발 9년 전인 1583년 나주읍성 동점문 안쪽 성벽 옆에서 창건했다. 이후 다섯 차례의 이정과 세 차례의 폐정으로 반세기에 이르는 세월 동안 활쏘기의 맥이 끊어지다 이어지기를 되풀이했다. 인덕정 입구에 세워진 연혁비가 전해지지 않은 <인덕정기(仁德亭記)>를 대신해 지난한 역사를 전한다.

“천년고도(千年古都) 목사골 나주는 진산(鎭山) 금성의 정기를 받아 유유히 흐르는 남도의 젖줄 영산강과 더불어 산자수명(山紫水明)하며 문무 연면(連綿)한 풍류의 고장이며 최성(最盛)하여 인덕정(仁德亭)·군자정(君子亭)·영취정(暎翠亭)이라 칭(称)하던 사정(射亭)이 있어 시대 변천에 따라 파란곡절(波瀾曲折)을 겪으면서 유일하게 현대의 인덕정은 명맥을 다하면서 전국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됨은 오로지 선인 선배들의 각고면려(刻苦勉勵)한 결과로서 숭고한 지덕체(智德體)의 수련도장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인덕정은 문무반층을 주축으로 읍성 동문 내의 인덕지반(仁德池畔)에 정을 건립했으나 연대미상으로 (약 400여년 전) 서기 1739년 신해(辛亥)에 중수하고 약 170여 성상(星霜)의 화평시 국궁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봉사한 숭고한 업적은 감개무량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일제 학정(虐政)은 문화말살정책으로 억압(抑壓)당해 1910년 경술(庚戌)에 일시 폐정케 되니 국운과 함께 통분의 극치였다.

1920년 경신(庚申) 왜구(倭寇)의 유화정책으로 노변(路邊)에 방시책(防矢柵) 설치를 조건부로 당시 사수(射首) 김희주 등 제씨(諸氏)의 주선으로 정(亭)이 활기를 찾았으나 역시 왜정의 박해에 역부족, 망국의 한을 품고 폐정(廢亭), 기후(其後) 1935년 을해(乙亥) 국궁 재개(再開) 회합에서 사정재건기성회 조직 회장에 기동열 등 제씨의 헌신적 활동으로 익년(翌年) 월정봉록하(月井峰麓下)에 사정을 신축, 정호(亭號)를 군자정이라 하고 당시 사수(射首) 최승환 등 제씨 피선(被選)돼 국궁 활성화에 진력, 세계 제2차대전으로 폐정상태에서 설상가상 1950년 6·26 동란 대마(大魔)로 궁시유품 등이 회신(灰燼)되니 어찌 통탄치 않으리오.

어헌불운(扵獻不運)만 거듭하랴. 광복되는 천운은 국궁계에도 서광(曙光)이라 1965년 을사(乙巳)에 안희상 김재홍 최남구 양용택 신원영 안국환 나종수 김만흥 최태희 이천수 등 제씨들이 폐정됐던 인덕정 고(古)건물을 현 남산공원에 이축단청(移築丹靑)하니 재신(宰臣) 월정(月井) 금성(錦城)의 연봉을 병풍(屛風) 삼고 영봉(靈峯) 무등(無等)과 국사봉(國師峰) 월출산(月出山)의 조망(眺望)은 화폭(畫幅)을 연상(聯想)케 하는 정(亭)이라. 1971년 신해(辛亥)에 연혁비 건립을 발의(發議)한 지 20여년, 작금(昨今)의 사원(射員)들의 성금으로 인덕정 사적(史蹟)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극지우성(克底于成)하니 영세 불휴불멸(不虧不滅)하리라.”

인덕정 사대에서 바라본 무겁 전경. [사진=한정곤 기자]

◇ 폐정 기간만 반세기…1965년 재건
창건 당시 인덕정은 동점문 북쪽, 현 나주경찰서 인근의 옛 5일 장터 자리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외진 곳으로 인적이 드물고 교통이 불편해 4년 뒤 객사 금성관 자리인 동헌 인근으로 옮겨갔지만 이번엔 인구가 늘고 가옥이 밀집해 1653년 다시 옛 동점문 안쪽 성벽 근처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 광주와 목포를 잇는 광목간 도로가 활터와 맞닿아 개통되면서 왜경은 통행인 불편과 위험 등을 이유로 강제 폐정해 버렸다. 창건 327년 만이었다. 도로변에 방시책을 세우고 10년 만인 1920년 다시 활터의 문을 열었지만 이마저도 같은 이유로 오래가지 못해 급기야 자진 폐정해야 했다. 그후 1936년 사정을 중수했지만 인덕정의 동점문 시대는 이미 막을 내린 후였다. 인덕정이 있었던 나주경찰서 인근의 옛 5일 장터는 현재 일부 민가 등이 들어섰지만 상당 부분 여전히 공터로 남아있다.

활쏘기를 하지 않은 활터에서는 자전거 대회가 열렸다. 1920년 5월 9일자 매일신보는 ‘나주 자전차 운동회’라는 제목으로 “오는 5월 16일에 나주 동문 내 인덕정 구 사정에서 유지신사제씨의 주최로 자전차 운동회를 개최하기로 준비했다”면서 “다수의 선수가 맹호질풍적 대경기를 치룬 후 여흥의 연극이 있어 장관을 이룰 모양”이라고 보도했다. 활터 문을 다시 열었던 그해 5월이지만 ‘구 사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재개정에서 자진 폐정까지는 몇 년도 아닌 고작 몇 달에 불과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후 조선중앙일보 1934년 6월 8일자에는 ‘남조선 자전차 경주대회’가 역시 인덕정 구 사정에서 개최된다는 광고가 게재됐다. 나주 지역 대회로 개최됐던 자전거 대회가 전국 단위로 확대된 것이다.

활터를 자전거 대회 장소로 내준 채 명맥이 끊길 뻔했던 나주의 활쏘기는 1935년 사정신축기성회가 조직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이듬해 나주향교 서쪽 월정봉 아래 한수제 인근에 대지 500평, 건평 20평 기와 1동과 관리인 숙소를 신축하고 군자정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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